해방촌의 숨겨진 ‘순수’ 순 박물관 더 월(The Wall)

해방촌 이야기

남산 아래 생겨난 첫 동네 ‘해방촌‘. 이름 그대로 8.15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6.25전쟁으로 온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고 살게 된 것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과거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군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미 군정이 들어서게 되었고 점차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들어온 초기 주민들을 해방촌 1세대라고 한다. 1세대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지방에서 꿈을 안고 상경한 사람들로 채워졌고 이들을 해방촌 2세대라고 한다. 2000년대 이후 산업이 발달하면서 이곳은 미군 사병들의 주택지로 인기를 끌었고 많은 외국인과 청년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을 해방촌 3세대라고 한다. 해방촌은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면서 많이 발전되었고 타지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해방촌은 이제 해방촌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정착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해방촌 108계단 경사형 승강기

후암동 종점, 해방촌 입구에는 108계단과 경사형 승강기가 있다. 이 계단은 일제 강점 말기에 건설된 경성 호국 신사의 진입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 경성 호국 신사는 해체되고 지금의 108계단만 남았는데 급경사에 가파른 계단으로 어르신, 유모차 이용자 등 교통약자가 오르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2013년에 이동 편의시설인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게 되었다.

경사형 엘리베이터는 처음 타봤는데 이동이 조금 느리긴 하지만 여유롭게 경치를 볼 수 있는 것이 참 좋았다. 밤에는 조명이 나와서 더 근사하다. 이 108계단 위로 올라오면 신흥시장과 해방촌 오거리가 나온다.

신흥시장의 변화

해방촌에서 진행된 도시 재생 사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신흥시장’. 해방촌과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신흥시장은 니트산업이 호황이던 70~80년대까지만 해도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을시장으로 번성했으나 이후 니트산업이 쇠퇴하면서 함께 쇠퇴하고 있었다.

위 사진은 이번에 방문한 해방촌 신흥시장의 모습이다. 오래된 벽돌 건물과 하얀 기둥의 조합은 익숙하면서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기존에 있던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없애고 밤에도 환하게 빛날 수 있는 아케이드를 설치하면서 이전에 너무 노후화된 느낌은 지우고 옛 공간이 주는 추억과 감성은 그대로 남겨둘 수 있었다. 단순히 과거의 풍경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비어있는 가게들 사이로 개성 있는 카페나 음식점 펍 등이 새로 생겨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흥시장이 더 매력 있는 이유는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과 음식 그리고 문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었던 만큼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마음들이 모여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를 가진 해방촌이 되었다.

신흥시장, 해방 교회 그리고 해방촌 성당 쪽으로 쭉 내려와 해방촌 외곽을 걷다 보면 옆에 미군 기지 담벼락을 볼 수 있다. 이 담벼락과 철조망을 보면 이 곳이 미군 기지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이 실감 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길을 따라가면 오늘 소개할 순수박물관을 찾을 수 있다.

순수박물관’ THE WALL

해방촌 골목에 위치한 작은 박물관. 한 사람의 아주 사적인 인생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작은 박물관 ‘순수 박물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순수 박물관은 건축주가 이스탄불 여행에서 방문한 ‘순수 박물관’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하게 된 공간이다. 그렇기에 먼저 이스탄불의 ‘순수 박물관’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책의 이름이자 건물의 이름이기도 한 순수 박물관. 순수 박물관은 건축가이자 동시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다. 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책의 내용에 충실하다. 이 책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박물관을 짓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작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박물관을 보고 깊게 감명받은 건축주는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박물관이 없을까 안타까워하셨고 평범한 직장인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후 건축주는 김승회 교수님께 이러한 계획을 전달드렸고 흔쾌히 수락해 주신 김승회 교수님과 함께 순수 박물관 ‘THE WALL’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주택 리노베이션 과정

원래 이 주택은 건축주가 아내분과 살던 신혼집이었다.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건축주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이 건물의 쓰임을 고민하던 차에 순수 박물관을 기획하게 된 것이었다.

25년 된 이 다가구주택은 19평 정도 되는 작은 대지 위에 있으며 뒤편에는 용산 미군 기지 담벼락이 위치해 있다.

기존 건물의 외벽은 적벽돌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김승회 교수님은 저층부와 상층부 벽돌을 떼어내 중간층에 창문이 있던 자리를 막았다. 적벽돌을 재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과정이었지만 그 덕분에 이질감 없이 과거 창문이 있던 자리였음을 보여준다.

저층부에는 벽돌 대신 전면 유리를 사용하여 답답하지 않게 개방감을 주었다. 이 유리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안의 풍경을 내부의 공간에서는 외부의 풍경을 보여주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상층부에는 익스펜디드 메탈을 2중으로 사용하여 특유의 골뱅이 문양이 잘 보이도록 시공했다.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 만들어진 이 골뱅이 문양과 익스팬디드 메탈은 익숙한 골목길에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자칫 너무 거대해질 수 있는 파사드이기에 김승회 교수님은 코너에 엣지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아 매스의 부피감을 줄이도록 하였다. 이 익스펜디드 메탈은 주택이 보이는 전면 뷰는 차단하고 뒤의 미군 기지 뷰는 오픈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카페는 오롯이 건축주의 취향대로 꾸며져서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하며 거기에 브라스와 간접 조명을 통해 따뜻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길고 좁은 형태의 공간에 맞춰 카운터와 펜던트를 길게 제작하였고 세로로 길쭉한 비례의 격자 장식장을 사용하여 공간에 어울리도록 하였다. 개인적으로 이 카페 공간의 포인트는 바로 은은하게 퍼지는 빛의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브라스 재질과 또 길쭉한 유광 타일에서 번져오는 빛의 느낌이 공간을 더욱 따뜻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든다.

2층부터 전시가 시작되는데 층을 올라가는 계단 부분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공간에 포인트를 주면서도 동선을 명확하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시 & 내부 공간

전시는 건축주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사진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 레고 등 볼거리가 많으니 직접 방문해서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이 전시의 재미있는 점은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한다는 점인데 50분짜리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엿볼 수 있다.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거기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전시이다.

전시가 다 끝나면 옥상으로 안내하는데 옥상에서 보는 풍경이 또 너무 좋아서 기억에 남는다.

마무리

이 공간은 렉터스에서 활동하기 이전에 방문하고 너무 인상 깊었었어서 꼭 아티클로 소개하고 싶었던 장소였다. 건축주이자 동시에 이 순수 박물관의 관장님이신 사장님께서는 자신이 이스탄불 순수 박물관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던 것처럼 이곳에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자신처럼 마음 한구석에 이 공간이 깊이 자리 잡고 영감이 되어 한국에도 이런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나 역시 이 공간에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장님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