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재생 : 과거와 현재의 공존

공간과 재생 : 과거와 현재의 공존

계속해서 빈 곳에 새로운 건물은 들어서고, 시간이 지나면 몇몇 건물은 다양한 이유로 버려진다. 하지만 버려진 건물에도 역사는 있고, 주민들에게는 추억이 담겨있다. ‘재생 건축’은 이 모든 것을 보듬어준다.
‘재생 건축’이란 과거의 건축물에서 주요한 정체성을 해치지 않고, 원형 혹은 그 일부를 디자인 요소로 살려 새로운 기능과 용도의 공간으로 되살리는 건축을 의미한다. 버려지는 공간은 늘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재생 건축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재생이 이루어진 새로운 공간 세 곳을 방문해보았다.

50년 만에 베일 벗은 군사시설, ‘홍제 유연’으로 재탄생하다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유진상가. 언뜻 보면 그저 낡은 건물이지만, 1970년 대한민국 주상복합단지 첫 세대이자 군사시설로도 설계되어 깊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건물이다. 북한의 남침을 대비하여 지었던 건물인 만큼 상가 하부가 통제 중이었으나, 새로운 예술 공간 ‘홍제 유연’으로 재탄생하여 50년 만에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홍제 유연’은 ‘흐를 유(流)’와 ‘만날 연(緣)’으로 이루어져 이음과 화합의 뜻을 담아 예술과 함께 유연한 태도로 다양한 교류를 이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제 유연은 서울시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민의 삶이 담긴 동네의 고유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표현하여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간다. 유진상가 중심부, 홍제천 산책로와 이어져 있으며 홍제천을 따라 걸으며 누구나 무료로 공공예술작품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벽면에서 재생되고 있는 유진상가 상인의 인터뷰

유진상가는 사실 검색하면 재건축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다수일 만큼 노후화로 인해 역사적 의미보다는 철거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건물 바로 위에 고가차도가 생겨나고, 함께 있던 유진맨숀은 주거의 역할을 잃었다. 어떻게 보면 ‘없애려는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유진 상가 아래에 숨겨져 있던 공간을 예술과 결합시켜 공개한 것은 유진상가에 대한 관심을 더 끌고 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함일 것이다.

작품 ‘흐르는 빛, 빛의 서사’
작품 ‘온기’

언뜻 보면 그저 지하 공간 확보를 위해 세워진 기둥처럼 보이지만, 이 기둥의 본래 목적은 탱크 통행을 위함이었다. 기둥에는 세월을 말해주는 듯 글자와 숫자가 그대로 남아있어 과거의 공간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현재는 유진상가 지하에 길게 늘어진 기둥들과 홍제천을 이용한 빛의 작품들이 반복하여 재생되고 있다. 50년간 햇빛이 들지 않았던 지하 공간에 자연의 빛과 작품의 빛이 어우러져 예술로 이어진다. 기둥 사이로 이어지는 빛의 향연이 물에 비치는 모습은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홍제 유연에는 총 10개의 작품이 전시 중이며, 주로 과거의 홍제천과 유진상가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원하는 모습까지 그려내고 있다. 낡은 콘크리트 구조들과 자연이 조화된 특유의 지하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공 미술은 앞으로도 다양한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홍제 유연에 담긴 홍제동만의 이야기를 감상하며 재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홍제 유연
위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48-84
개방시간 10:00~22:00
사이트 ‘서울은 미술관’ (클릭)

근대 건축에 멈춰있는 ‘정동 1928 아트센터’

서울 한가운데, 서울 기념물로 지정되어 새로운 공간으로 도약 중인 곳이 있다. 1928년 처음 ‘구세군사관학교’로 설립되어 1959년 증축공사 후 ‘구세군 중앙회관’으로 불렸으며, 그리고 현재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정동 1928 아트센터’를 소개한다. ‘정동 1928 아트센터’는 1920년대부터 신사참배 반대 운동, 6·25전쟁,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함께 경험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건축물이다.

외관은 복잡한 장식 없이 단순하게 이루어져 좌우대칭의 안정감을 느끼게 하며, 특히 벽돌조의 외관과 중앙현관의 4개의 기둥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어 건축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일부 증축과 개조가 있긴 했지만, 건축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내부 또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과거 근대 건축물이라는 것이 실감 나게 한다. 외부와 같이 넓은 창, 계단, 복도가 모두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동 1928 아트센터’는 1층에는 갤러리와 사무실, 2층에는 이벤트홀, 회의실, 라운지로 나누어져 있으며, 필요에 따라 대관도 가능하다. 전시 외에도 공연, 강연 등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1층 갤러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 ‘니콜라 푸치 – 당면한 순간의 당연한 세계’

기존 사관의 기숙사와 식당으로 운영되던 1층은 갤러리로 개조되었다. 천장에는 세월의 흔적이 담긴 목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어 공간에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목구조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설치한 조명이 잘 어우러진다. 작품을 둘러보며 걸을 때마다 들리는 옛날 느낌의 목재 바닥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는 내가 거의 100년이 되어가는 건물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한껏 설레게 한다.

2층 이벤트홀은 독특한 천장 구조가 눈에 띈다. 건립 당시의 지붕 짜임이 남아있는 공간으로, 중세 말기 영국에서 유행한 장식용 목재 천장 스타일인 ‘해머빔(Hammer beam)’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예배당이자 집회를 위한 공간이었으나, 현재 결혼식, 공연 등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내관과 외관의 과거의 흔적은 남겨두고, 가구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대칭을 추구하던 과거 건축 양식을 유지해 새롭게 들여온 가구까지도 대칭을 유지하며 안정감을 준다. 이렇게 내가 직접 과거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건축물에서 즐기는 문화생활은 얼마나 뜻깊은 경험인가. 지금까지 역사적 건물의 본모습을 ‘복원’함으로써 재생 건축을 만들어낸 ‘정동 1928 아트센터’였다.

정동 1928 아트센터
위치 서울 중구 덕수궁길 130 구세군 중앙회관
영업시간 평일 09:00~18:00 (12:00~13:00 휴게시간), 주말 휴무
인스타그램 @jeongdong_1928
사이트 (클릭)

폐공장 속 문화공간, 코스모40

©허승범

건축 목적이 사라지고 버려진 건물은 꼭 철거되어야만 하는가. 인천 서구 가좌동 코스모화학 공장단지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이전으로 수많은 공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중 유일하게 남은 40동 건물.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이 40동 건물을 가좌동의 역사라고 여기며 철거하지 않고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좌) 신관, (우) 기존 공장 ©허승범

설계 당시 건축가가 원하는 방향과 건축법 모두에 따르기 위해선 신관과 기존 공장의 건물이 닿지 않아야 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관은 공장 건물 안에 고리 형태로 들어가 빠져나오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신관을 공장 외관과 어우러지게 하지도 않고, 이질감이 들도록 설계하여 오히려 독보적이고 낯선 느낌을 준다. 신관에는 여러 F&B가 입점해있고, 기존 공장 건물은 메인 홀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 공장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크레인, 안전 표지판까지 그대로 남아있으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마저도 실제로 공사장에서 이용하던 것이다.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인 만큼 층고가 매우 높아 계단을 올라가면 실내가 한눈에 보이는데, 이뿐만 아니라 천장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기계실과 같이 일반인이 흔히 접할 수 없는 부분들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카페 좌석으로 만들어 하나의 박물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허승범

3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있다 보면 숨겨진 통로처럼 보이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이끌리게 된다. 계단을 통해 내려오면 만화 속 비밀 공간 같은 넓은 라운지가 반겨주고, 카페와는 반전된 분위기를 보여준다. 카페 아래 1, 2층은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를 위해 비워둔 공간이다. 가운데에서 지속해서 빚을 내는 두꺼운 콘크리트 기둥들은 공간에 웅장함을 더해준다.

©허승범

카페 곳곳에서는 예술 작품의 조명을 발견할 수 있다.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가고, 커피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본다. 곳곳에 보이는 이러한 조명과 공장의 모습들. 공장 계단을 보곤 이끌리듯 위로 올라가 보고, 실제 공장 통로를 걸으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또 카페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고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본다. 그리고서 카페보다 넓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접한다. 이렇게 시선이 닿는 곳과 동선까지 세심하게 생각한 건축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허승범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공간들도 언젠가 버려질 수 있고, 지금 목적이 분명한 건축물도 후에 다른 용도의 건축물로 재생되어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재생공간은 더욱더 다양한 방면으로 늘어날 것이다. 재생 건축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공간에서 새로운 현재를 즐길 수 있다. 여러분도 재생공간에 방문하여 색다른 공간감을 느껴보길 바란다.

코스모40
위치 인천 서구 장고개로231번길 9
영업시간 평일 10:00~20:00, 주말 10:00~21:00
인스타그램 @cosmo.40
사이트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