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여러분에게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여행에는 다양한 목적이 존재합니다. 휴식, 음식, 관광 등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여행의 목적은 달라집니다. 게다가 여행을 누구와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와 같은 변수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필자에게 여행의 목적은 ‘건축’입니다. 어떤 장소를 여행하던 건축적인 시선이 담기게 되는데요. 건축학도가 전국을 여행하면서 찾은 공간들을 도시별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를 소개하겠습니다.
전주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입니다. 한국의 멋을 담고 있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어우러져 가장 한국적인 도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건축학도의 시선으로 전주만의 아름다움을 담은 여행지 3곳을 소개하겠습니다.
문화재생사업을 통한 카세트 공장의 화려한 변신, 팔복예술공장

첫 번째로 소개할 여행지는 전주 팔복예술공장입니다. 팔복예술공장은 25년간 문이 닫혀있던 카세트 공장을 리모델링하여 새롭게 탄생한 복합문화공간입니다. 다양한 설치미술 작품과 전시회, 도서관 등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공간은 카세트를 생산하는 공장이었습니다. 한때는 500명에 가까운 근로자가 일했던 제법 규모가 큰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디지털 산업이 발달하면서 카세트 테이프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결국 공장은 문을 닫아 수십 년간 방치된 공간이 돼 버렸습니다. 이렇게 방치된 공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행하는 ‘산업 단지 및 폐산업 시설 문화재생 사업’을 통해 지금의 팔복예술공장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문화재생 사업’은 기존의 건물을 부수고 신축하는 ‘재건축’이나 시설 개보수(리노베이션)와 다릅니다. 문화재생 사업의 목적은 물리적으로 시설을 개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업추진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지역만의 고유한 특성이 담긴 장소로 만들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팔복예술공장 총괄 디렉터를 맡은 황순우 건축가는 도시재생이란 물리적인 공간보다 그 속에 담긴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1년 동안 공간을 설계하지 않고 기억을 재생시키는 작업, 참여하게 하는 작업, 예술가를 통해서 그 공간을 다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을 했다. 물리적인 것은 맨 마지막에 했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만들어진 팔복예술공장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겠습니다.

팔복예술공장은 A동과 B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A동에는 창작스튜디오와 전시장, 팔복아카이브, 커피숍, 옥상놀이터 등이 있고, B동에는 예술놀이터, 다목적 공간, 야외광장,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 등의 공간이 있습니다.


팔복예술공장에는 역사를 담고 있는 다양한 설치미술과 공간들이 준비 돼 있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팔복 아카이브 공간으로 전주 산업단지와 카세트 테이프 공장, 그리고 문화재생 사업의 과정과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두 번째 사진은 화장실에 전시된 설치미술로 과거 카세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이곳에 설치된 화장실 4칸은 400명에 달하는 여공들이 일하는 건물에 유일한 화장실로,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팔복예술공장의 여러 공간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팔복예술공장은 예술가와 시민, 기업과 주민이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예술 플랫폼문화적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레지던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활동을 지원받습니다. 시민은 그러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고, 예술 교육을 받기도 합니다. 기업은 공간을 대관하여 전시를 주최하고, 주민은 일상 속에서 문화공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재생을 위한 전시회, 카페 써니, 예술놀이터, 도서관 등 여러 공간과 프로그램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생사업을 통한 카세트 공장의 화려한 변신, 팔복예술공장을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우리나라 한옥의 변천사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마을, 전주한옥마을

다음으로 소개할 여행지는 전주한옥마을입니다. 전주한옥마을은 풍남동 일대에 700여 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촌입니다. 전동성당, 경기전, 오목대 등 중요 문화재와 함께 전통문화센터, 공예품 전시관, 전통술박물관 등 여러 문화시설이 있어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지닌 관광명소입니다. 한글, 한복, 한옥, 한지, 한식, 국악 등 한 스타일이 집약되어 연간 천만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1905년 조선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전주에 유입되는 일본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일본 상인들이 최대 상권을 차지하면서 전주 부성 내 중심가까지 장악하였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대립으로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마을을 형성하였는데요, 이 마을이 오늘날 전주한옥마을의 시작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전주 한옥마을은 국내 도시한옥 중에서 보기 드물게 집단적으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꾸며진 도시가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살아가는 한옥과 함께, 조상들의 생활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각종 전통문화시설이 어우러져 큰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건축적인 측면에서는 마을 전체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물부터 근대화에 따라 점차 변화하는 한옥의 형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잘 담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을 뽑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건축물은 경기전입니다. 경기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1410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일부 불탔지만, 1614년에 중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기전은 크게 정전, 별전, 부속채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전은 태조 어진을 봉안한 진전건물로, 건물 구성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진전도’와 일치하고 있어 조선 초 태조진전의 건축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경기전은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고 견고하며,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가 건축적 품위를 돋보입니다. 이외에도 경기전에서 조선시대의 주요한 유형문화재를 구경할 수 있으며, 다양한 공연이나 행사를 진행하여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할 건축물은 전동성당입니다. 전동성당은 우리나라의 최초 천주교 순교자(신앙 때문에 박해받아 목숨을 잃은 사람)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리며 만든 성당으로, 호남지방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건물입니다.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터로서 종교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 차원에서도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동성당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건물 중 하나로 뽑힙니다.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은 비잔틴 양식의 특징이 도드라지고, 두툼한 외부 벽체와 반원아치의 깊숙한 창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입니다. 적색과 회색의 벽돌이 조화를 이루고, 채광창과 아치의 형태가 전반적으로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전동성당은 당시의 건축기법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건물로, 직접 방문하여 천천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전주한옥마을은 문화재뿐만 아니라 골목골목 걷다 보면 나타나는 한옥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사람이 많은 한옥마을 중심지와 다르게 한적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옥의 멋스러움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한옥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로 만들어진 근대 도시한옥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밀집되는 대지조건에 의한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도시 한옥은 공간이 한정됐기 때문에 평면구성이 간소화되었습니다. 또한 유리나 함석, 콘크리트와 같은 근대 재료가 사용된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한옥마을의 골목길을 걸으며 사람들이 생활과 문화가 반영된 한옥을 느끼길 바랍니다.
우리나라 한옥의 변천사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마을, 전주한옥마을을 방문해보는 건 어떤가요?
과거와 현재의 아름다운 조화, 아원(我園)

마지막으로 소개할 여행지는 전라북도 완주에 위치한 아원(我園)입니다. 아원고택은 전주에 위치하지 않지만, 차로 30분 거리에 있어 전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입니다. 아원(我園)은 250년이 넘은 한옥을 지금의 위치로 이축하여 미술관과 생활공간을 더해 만든 공간입니다. 250년이 된 한옥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한옥 스테이와 현대적인 건축을 자랑하는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갤러리에는 전시된 작품의 수는 10점도 안 되지만, 건축 그 자체로 전시 이상의 즐거움을 주고 있어 관람객들이 꾸준히 찾고 있습니다. 또한 깊은 산 속에서 자연과 함께 고즈넉한 한옥을 즐기고자 방문하고 있습니다.

아원(我園)의 1층은 갤러리와 카페로 구성돼 있고, 2층은 천지인과 사랑채, 안채, 별채로 구성돼 있습니다. 동선에 따라 아원(我園)의 공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자갈길을 따라 걷다 보면 높은 노출 콘크리트 담장을 마주하게 됩니다. 벽을 덮고 있는 푸른 담쟁이덩굴과 위로는 한옥의 아름다운 처마선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광활한 산의 조화는 이질적이면서도 마치 산속의 위치한 성을 연상시키면서 고즈넉함이 느껴집니다. 노출 콘크리트와 한옥의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저 벽 뒤의 공간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자연스럽게 입구로 향하게 만듭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요, 매우 좁고 어둡고 복도에 들어서면서 전반된 분위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두웠지만 따뜻한 빛의 조명이 노출콘크리트에 닿으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밖에서 들리던 자연의 소리가 차단되어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복도가 매우 좁아서 두 사람이 같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는데, 덕분에 일행과 잠깐 떨어지게 만들면서 그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좁은 복도를 지나면 넓은 공간이 나타나면서 시선이 극적으로 개방됩니다. 이 공간은 갤러리의 메인 공간으로 미디어아트를 중점으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과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고여있는 물 그리고 그 너머 전시된 작품이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마치 이 공간을 위해 전시가 계획한 듯 공간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갤러리를 나서면 야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한 좁은 계단이 나타납니다. 좁은 계단은 방문자의 시선을 제한하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빛을 따라 야외로 향하게 만듭니다. 계단을 통과하면 푸른 식물들과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면서 또 한번 시선을 제한합니다. 마지막으로 고택이 있는 공간에서 시선을 개방하여 극적인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이처럼 시선의 제한과 개방을 반복하면서 방문자의 동선을 유도하고 극적인 효과를 만들고 있습니다.


고택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면 단아한 한옥 세 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쉼을 얻는 곳’이라는 만휴당과 경남 진주의 250년이 넘은 고택을 이축한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흔히 한옥을 이축하는데 4~5개월이 걸리는 반면, 아원고택은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이는 50년이 넘은 돌담과 대나무 숲 등 집터가 원래 지닌 것들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아원고택에서는 어디서나 종남산의 능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옥은 주로 남향이지만, 아원고택은 종남산을 바라보도록 하였습니다. 덕분에 짙은 초록의 종남산과 그 위로 보이는 맑은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별채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위치한 현대 건축으로, 누드 콘크리트와 미니멀한 건축이 특징입니다. 아원의 대표이자 건축가인 전해갑 대표는 별채를 실내에서 한옥의 외관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창문이 좌식 눈높이에 맞춰져 창밖으로 종남산과 한옥의 추녀와 처마선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건축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고택과 그 뒤로 중첩되는 산의 풍경은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수백 년의 시간이 담긴 한옥과 현대적인 건축이 만들어내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 아원(我園)을 방문해보는 건 어떤가요?
마치며
건축학도의 시선으로 소개한 전주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입니다. 실제 주민들이 살아가는 전통한옥과 함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문화시설이 어우러져 소통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습니다. 평소 가는 여행에 이러한 건축적인 시선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여행의 목적이 오로지 ‘건축’이 아니더라도 이 글을 통해 건축적인 시선에 관심이 생기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