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MAX: 데이터와 밀도로 다시 쓰는 건축의 역할
S,M,L,XL 이후, FARMAX라는 또 하나의 ‘필독서’
건축을 전공했거나, 건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들이 있다. OMA의 렘 콜하스, 그리고 그들의 매니페스토와도 같은 『S,M,L,XL』, 또한 현대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실험적 건축 집단인 MVRDV와 그들의 이론서이자 리서치 매뉴얼인 『FARMAX: Excursions on Density』가 바로 그것이다. 건축학도라면 이 두 권은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언어”에 가깝다.
본 글은 MVRDV의 『FARMAX』의 시선으로 밀도와 데이터, 그리고 고밀–비움의 교환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하나의 설계 이론으로 체계화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FARMAX를 “요약”하기보다는, 그 핵심 사유의 흐름을 프롤로그부터 결론까지 하나의 글처럼 따라가며, 건축학도뿐 아니라 건축에 관심 있는 독자도 이 이론의 기본적인 구조와 핵심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 목표다.

1P : MVRDV라는 집단
● 네덜란드라는 실험실, 리서치로 움직이는 사무소
MVRDV는 1993년 위니 마스(Winy Maas), 야콥 반 라이스(Jacob van Rijs), 나탈리 드 브리스(Nathalie de Vries)가 로테르담에서 설립한 건축·도시설계 그룹으로, 이름 자체가 세 설립자의 이니셜을 이어 붙인 것이다. 이들은 초창기부터 주거, 도시, 인프라, 풍경을 하나의 연속적 시스템으로 다루며, “실험실로서의 네덜란드”를 전제로 한 강한 리서치 성향을 드러냈다. 네덜란드라는 평탄한 국토, 극단적으로 관리된 농지·수공간, 그리고 치밀한 계획 전통이 이들에게는 실험을 위한 데이터와 조건의 집합으로 기능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초저지 국가로, 제한된 땅 위에 고밀 개발이 강제되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MVRDV는 이 특수한 맥락을 “압박이 아니라 기회”로 읽으며, 수평적 스프롤을 수직·3차원 스택킹으로 전환하는 실험을 지속해 왔다. FARMAX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집약된 첫 번째 대형 이론서이자, 이후 『KM3: Excursions on Capacities』, ‘MetaCity/Datatown’ 등으로 이어지는 데이터·밀도 연구 시리즈의 출발점이다.

2P : FARMAX란 무엇인가: 책의 정체와 구성
● ‘Excursions on Density’: 밀도에 대한 건축적 여행기
『FARMAX: Excursions on Density』는 제목 그대로 “밀도(density)에 대한 여러 번의 여행/실험”을 기록한 책이다. 010 퍼블리셔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MVRDV와 델프트 공대, 베를라헤 인스티튜트, 로테르담 아카데미 학생들이 수행한 연구와 스튜디오 작업, 그리고 여러 필자의 에세이를 한데 엮은 건축적 내러티브(narrative)이다. 내용은 그래프, 다이어그램, 컴퓨터 시뮬레이션, 텍스트, 사진, 콜라주가 뒤섞인 형식으로, 정통적인 이론서라기보다 실험실 노트에 가깝다.
FARMAX의 핵심 주제는 “FAR(Floor Area Ratio, 용적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도시/건축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한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다. ‘FARMAX’라는 제목은 바로 이 최대 용적률의 세계, 즉 FAR를 현실 규제치로서가 아니라 설계 전략의 출발점으로 뒤집어 읽는 태도를 가리킨다. 책은 네덜란드의 평범하고 낮은 밀도의 전원 주거지부터, 홍콩·Kowloon Walled City 같은 극단적 고밀 사례, 그리고 완전히 가상의 도시 모델까지 폭넓게 다루며, “밀도가 문제인가, 아니면 밀도를 다루지 못하는 설계가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3P: 밀도 문제를 뒤집는 전제: ‘밀도=악’의 프레임 해체
● 저밀 스프롤 vs 고밀 집약: 누구를 위한 ‘쾌적함’인가
네덜란드에서 FARMAX가 출발한 배경은, 값싼 저층 주택 단지와 저밀 오피스·물류 창고가 끝도 없이 퍼져 나가며 ‘회색 스프롤’을 형성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이 스프롤은 겉으로 보기에는 쾌적한 녹지와 여유로운 주거를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토지·인프라 비용, 교통·에너지 낭비, 농지와 자연의 잠식을 동반한다. MVRDV는 “저밀=좋음, 고밀=나쁨”이라는 직관을 정면으로 의심하며, 오히려 밀도를 극단까지 끌어올림으로써 농지와 자연을 지키고, 도시 인프라를 효율화할 수 있다는 역발상을 제시한다.
즉 FARMAX의 전제는 “밀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밀도를 공간·프로그램적으로 설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다. 고밀을 무조건 피하는 대신, 고밀과 비움(오픈 스페이스)의 관계를 재조정하고, 3차원적으로 쌓인 프로그램 사이에 얼마나 다양한 공공성·여가·생산을 끼워 넣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론의 출발점이다.

4P: FAR → FARMAX: 규제치를 설계 이론으로 전환
● 용적률을 ‘한계’에서 ‘도구’로
FAR(용적률)는 일반적으로 도시계획과 건축에서 “넘지 말아야 할 규제치”로 인식된다. MVRDV는 FAR를 ‘벽’이 아니라 ‘변수’로 뒤집어, 설계 이론의 핵심 파라미터로 끌어올린다. FARMAX라는 단어는 “FAR를 극대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FAR가 허용하는 최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하는 실험”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예를 들어 동일한 FAR 400%라도, 수평형 저층 스프롤 vs 수직형 타워 vs 3차원 스택킹 복합체 등 완전히 다른 공간 구성이 가능하다.
FARMAX에서는 각 사이트의 규제 FAR, 인구 밀도, 필요한 프로그램 면적 등을 수치로 설정한 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배치·스택킹 시나리오를 생성해 비교한다. 전통적으로는 법규를 최소한으로 맞춘 뒤 ‘형태’를 고민했다면, 여기서는 법규·규제가 곧 매스·단면을 생성하는 설계 알고리즘의 일부가 된다. 이때 설계자는 규제를 피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규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도시·건축 형식을 뽑아내는 ‘연산자’로 자리 잡는다.

5p: 데이터스케이프: 데이터가 곧 설계 지형
● Datatown과 Metacity: 숫자로 그린 도시
MVRDV의 작업에서 ‘datascape(데이터스케이프)’라는 용어는, 수많은 수치·조건·규제가 하나의 입체적 지형처럼 시각화된 상태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가 가상의 도시 ‘Metacity/Datatown’ 프로젝트인데, 이 도시는 구체적인 위치나 역사 등 맥락 없이, 오직 인구, 에너지, 식량, 폐기물, 교통, 환경 규제 같은 데이터만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인구 밀도를 네덜란드의 네 배로 고정하고, 이동 시간, 소비 패턴, 토지 이용 비율 등의 파라미터를 설정하면, 그 결과로 도시의 크기와 구조, 필요한 농지와 숲의 양이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방식이다.
FARMAX에서 데이터스케이프는, 네덜란드의 국가 단위 통계부터 개별 부지의 규제·요구 조건까지를 포괄하는 설계 지형이다. MVRDV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능한 한 많은 요인—법규, 기술, 예산, 정치, 사용자 요구—을 수집한 뒤, 이를 표·그래프·3D 다이어그램으로 변환한다. 이 데이터 지형 위에서 프로그램이 어디에 쌓이고, 어느 부분이 비워지며, 어떤 레벨이 공공·생산·녹지로 쓰일지 결정되는 것이다. 즉, 데이터가 단순 참고 자료가 아니라 ‘형태를 낳는 땅’이 된다.

6p: 고밀-비움 교환 이론: 많이 쌓되, 과감히 비운다
● Void as Value: 비움이 곧 가치가 되는 전략
FARMAX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꽉 채우기”가 아니라, “고밀과 비움의 교환”이다. 같은 FAR를 유지하더라도, 일부 영역을 극단적으로 고밀하게 만들고, 그 대가로 다른 영역을 넓게 비워 공원·농지·공공 오픈스페이스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비움(void)’은 남는 공간이 아니라, 고밀이 만들어낸 ‘권리’이자 적극적인 설계 자원으로 취급된다.
MVRDV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반복되는 전략은 “스택된 프로그램을 일부 삭제해 void를 만드는 방식”이다. 즉 3차원 스택킹으로 프로그램을 쌓아 올린 뒤, 특정 부분을 도려내어 중정, 공중광장, 수직 공원 등을 만드는 것이다. 이 삭제된 부분은 고밀 도시에서 필요한 빛·공기·시야·공공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되며, 밀도와 쾌적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안된다. 고밀=답답함이라는 직관을, 고밀×비움=새로운 공공성이라는 수식으로 전환하는 부분이 FARMAX 이론의 실질적인 설계 전략이다.


7p: 데이터 기반 설계와 3차원 스택킹 도시
● Datatown에서 KM3까지: 스택킹 도시의 체계화
FARMAX 이후, MVRDV는 『KM3: Excursions on Capacities』와 MetaCity/Datatown 전시 등을 통해 3차원 스택킹 도시 개념을 더욱 체계화한다. 이들은 “도시는 더 이상 수평으로만 확장되는 평면이 아니라, 위·아래·사방으로 겹쳐지는 3D 공간 필드”라고 주장하며, 지상 레벨 0이 사라지고 여러 층의 ‘새로운 지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도시를 상상한다. 이때 거리(street)는 엘리베이터·램프·에스컬레이터·브리지 등으로 대체·증식되며, 광장은 void나 입체적 연결 다발로 변형된다.
데이터 기반 설계(datscape)는 이러한 스택킹 도시를 만들어내는 ‘엔진’이다. 먼저 밀도·용적률·인구·프로그램 비율·환경 규제 같은 몇 개의 핵심 파라미터를 설정하고, 그로부터 가능한 도시·건축 상태를 탐색하는 식이다. 이 과정은 오늘날의 BIM·파라메트릭 디자인·시뮬레이션 기반 도시 계획의 선구적 형태로 평가되며, MVRDV 스스로도 “우리의 datascape는 BIM 기술의 전조였다”고 회고한다. 핵심은 “데이터→datascape→3D stacking→void 생성”이라는 일련의 설계 메커니즘이다.


8p: MetaCity/Datatown
● 위치 없는 도시, 숫자로만 정의된 형태
MetaCity/Datatown은 특정 국가나 도시가 아니라, 순수한 데이터에 의해만 정의되는 가상의 초고밀 도시이다. “도시는 한 시간 이내에 가로질러야 한다”는 이동 시간 기준, 네덜란드의 네 배 인구 밀도, 생활 방식에 따른 식량·에너지·폐기물·녹지 필요량 등의 파라미터를 설정한 뒤, 이를 계산해 나온 수치들로 도시의 크기·프로그램 비율·스택킹 구조를 도출한다.
이 프로젝트는 FARMAX의 논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datascape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FAR는 법규가 아니라, 전체 도시 규모·층수·농지 면적 등을 조율하는 상위 파라미터가 된다. 도시의 형태는 미리 정해지지 않고, 데이터 조합의 결과로 “발견”되는 것이며, 이는 FARMAX에서 제시된 “규제치를 설계 알고리즘으로 사용하는” 태도를 완전히 추상화한 사례이다. 동시에 이 도시는 실현 가능한 리얼리즘과 다소 공상적 디스토피아 사이의 긴장 속에서, 고밀·지속가능성·소비 패턴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Metacity / Datatown의 책과 실제 모델링 모습 (출처 : ©MVRDV)
9p: Silodam – datascape와 3D 스택킹의 현실화
● 프로그램의 컨테이너, 수직적·수평적 섞임
암스테르담 항만에 지어진 ‘Silodam’(2002)은 MVRDV의 datascape·스택킹 전략이 현실 주거 프로젝트에 적용된 대표 사례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사무소는 다양한 소득·가구 구성·면적을 가진 157개의 주거 유닛, 업무·공용 공간을 하나의 10층짜리 박스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정치인·행정·미래 거주자)의 요구가 상충하자, MVRDV는 모든 요구 조건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거쳐 최종 배치를 도출했다.
Silodam은 외형적으로는 물 위에 떠 있는 컬러풀한 컨테이너 박스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서로 다른 타입의 주거·프로그램이 층·구역별로 스택킹된 3차원 도시이다. 여기서 FAR는 항만부지의 용적률 규제와 햇빛·조망 조건 등에 의해 정해지며, MVRDV는 이 한계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주거 유형과 공용 공간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고밀-비움 교환” 전략을 실험한다. 공용 테라스·복도·중정은 스택된 매스에서 일부를 비워 만든 void로, 고밀 주거 속 공공성과 개방감을 확보한다. Silodam은 FARMAX 이론에서 말한 datascape→스택킹→void라는 프로세스가 실제 건축으로 구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10p: 네덜란드 고밀 주거 실험들과 3D City 전시
● 밀도 극대화와 ‘Hungry Box’
FARMAX 이후 MVRDV는 여러 고밀 주거·복합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논리를 적용해 왔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노인 주거 블록, 도크랜드 재개발, 고밀 주거 타워 등에서, 사무소는 먼저 규제 FAR·인구·프로그램 비율을 수집하고, 이를 스택킹한 뒤 일부를 도려내 void와 테라스를 만든다. ‘Hungry Box’와 ‘Endless Interior’ 같은 전시에서는, MVRDV 프로젝트들의 내부 공간 사진을 끝없이 이어 걸어, 스택킹과 void 전략이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실내 풍경을 시각화했다.
또한 ‘3D City’ 전시와 『KM3』에서는, FARMAX에서 다뤘던 밀도·용적률 논의를 전 지구적 스케일로 확장해, 도시를 “앞·뒤·옆뿐 아니라 위·아래까지 다층적으로 겹친 상태”로 정의한다. 이때 거리는 엘리베이터·램프·브릿지로 변형되고, 광장은 void와 연결 다발로 해체되며, 도시 전체가 하나의 3차원 datascape로 읽힌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전시들은 FARMAX의 이론이 특정 시기의 선언문이 아니라, 이후 MVRDV 작업 전반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FARMAX 이후, 건축가의 역할 재정의
FARMAX가 건축가에게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형태(form)는 마지막 결과일 뿐, 처음에 던져진 데이터와 조건의 편집·조합이 설계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건축가는 더 이상 천재적 직관으로 형태를 ‘창조하는’ 존재라기보다, 수많은 규제·욕망·환경 조건을 datascape로 조직하고, 그 위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를 탐색·선택하는 편집자이자 시뮬레이션 설계자에 가깝다. 이는 설계의 권한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가능한 세계들을 조율·조정하는 태도”로 역할을 재정의하자는 제안이다.
앞으로의 건축가는 “숫자에 종속된 설계자”가 아니라, 숫자·규제·욕망·환경을 하나의 지형으로 엮어내고, 그 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조율자가 되어야 한다. FARMAX를 읽는다는 것은, 단지 MVRDV의 특정 시대 스타일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밀도와 데이터의 시대에 건축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태도로 응답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이 글이 그 두꺼운 책을 직접 펼쳐보려는 시도, 그리고 스스로의 설계 논리를 점검해 보려는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