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일과 거대성의 건축: 램 콜하스의 S,M,L,XL 읽기
1300페이지의 벽을 넘기 위한 안내서
S,M,L,XL은 1995년 출간된 OMA의 20년 작업을 총정리하는 책으로, 약 1376페이지에 달하는 ‘건축 소설’이자 거대한 아카이브 형식의 이론서이다. 너무 두껍고 복잡한 구성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과 실무자들은 특정 프로젝트나 유명한 에세이만 발췌해 읽거나, 서가에 꽂힌 상태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은 그 벽을 조금 낮추어, 책의 정체와 구조, S·M·L·XL이라는 스케일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거대성(Bigness)’이 어떤 문제의식으로 제기되는지 압축해 전달하고자 한다.
램 콜하스는 이 책을 “건축 사무소에 대한 카미카제식 자기비판”이자 “메갈로매니악한 스케일 위의 겸손한 책”이라고 표현한다. 브루스 마우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프로젝트 도면·사진·스케치뿐 아니라 일기, 여행기, 동화, 비평, 용어 사전 등이 파편적으로 섞인 콜라주 형식을 취하며, 현대 도시와 건축의 혼종성과 불연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S·M·L·XL이라는 네 개의 스케일은 이 방대한 파편들을 구조화하는 장치이자, 콜하스가 건축과 도시를 이해하는 기본 프레임이다.

1P : 램 콜하스라는 인물
● 시나리오 작가에서 ‘글 쓰는 건축가’로
램 콜하스(Rem Koolhaas)는 원래 저널리즘과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글쟁이 출신으로, 뉴욕을 ‘무의식의 마천루’로 읽어낸 『Delirious New York』(1978)에서 이미 도시를 하나의 서사와 콜라주로 읽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후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를 설립해 유럽과 아시아, 미국을 오가며 도시·프로그램·경제를 동시에 다루는 프로젝트를 통해,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글 쓰는 건축가’의 전형이 되었다.
『Delirious New York』이 이론·비평 중심의 도시 선언문이었다면, S,M,L,XL은 그 이후 20여 년 동안의 실무와 이론이 중첩된 거대한 작업 노트이자 프로젝트 카탈로그이다. 램은 이 책에서 단지 작품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계획, 경제 그래프, 사무소의 과부하, 경쟁에서 떨어진 프로젝트까지 드러내며, 현대 건축이 처한 현실 조건과 모순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 점에서 S,M,L,XL은 ‘완성된 이론서’라기보다,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건축이 어떻게 버티고 교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 보고서에 가깝다.

2P : S,M,L,XL의 구조와 스케일 이론
● 네 가지 스케일로 읽는 현대 건축
S,M,L,XL의 제목은 동시에 책의 분류 체계이다. 프로젝트와 에세이들은 Small, Medium, Large, Extra-Large 네 가지 스케일에 따라 배열되며, 각 스케일은 단순한 크기 구분이 아니라 프로그램, 도시와의 관계, 복잡성의 차이를 의미한다. Small과 Medium은 주거·소규모 공공시설·단일 프로그램 등을 다루며, Large는 콜하스가 ‘거대성(Bigness)의 건축’이라 부르는 복합 대형 건축, Extra-Large는 도시·마스터플랜 스케일의 프로젝트와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 같은 도시 이론 에세이를 포함한다.
책 전반에 걸쳐 “Dictionary of S,M,L,XL”이라 불리는 용어 사전이 흩어져 있는데, 이는 콜하스가 현대 건축 상황을 읽기 위해 만든 새로운 어휘들의 집합이다. ‘Congestion(밀집)’, ‘Generic City’, ‘Junkspace’로 이어지는 개념의 단초들도 이 책 안에 등장하며, 스케일에 따라 같은 현상이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S,M,L,XL은 스케일에 따라 건축과 도시, 프로그램과 인프라의 관계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읽어내는 ‘스케일 이론의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

3P: S: Small, 작은 스케일의 실험
● 작은 건축에 응축된 건축적 사유
S에 속하는 프로젝트들은 단독주택, 소규모 인테리어, 파빌리온, 초기 실험적 작업 등이 중심을 이룬다. 작은 스케일에서 콜하스는 도시적 이슈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프로그램의 재구성, 공간 시퀀스, 평면의 변주를 통해 아이디어를 농축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작은 작업일수록 예산과 면적의 제약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복잡한 개념을 단순한 제스처로 압축하는 실험의 장이 된다.
S에서는 “큰 이론을 작은 몸체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스케일이 가진 일상성과 구체성이 강조된다. 사소한 동선·가구·문턱의 높이 같은 요소들이 프로그램의 재구성과 연결되며, 이 축적이 곧 이후 M·L·XL 스케일에서 거대하게 증폭된다. 즉 S는 거대성의 축소판이라기보다, 거대성 이전의 ‘건축적인 것’이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레벨이라고 볼 수 있다.


4P: M: Medium, 공공성과 프로그램의 확장
● 프로그램이 충돌하고 섞이는 집합의 스케일
M 범주는 학교, 도서관, 소규모 공공시설, 복합 문화 공간 등 하나의 건물이 여러 사용자와 프로그램을 포괄하는 규모를 포함한다. 이 레벨에서 콜하스는 “프로그램의 충돌과 혼합”을 통해 공공성을 새롭게 정의하려 하고, 순수한 유형(type) 대신 다양한 사용이 한데 엉켜 있는 상태를 건축적으로 조직하려 한다.
M 스케일은 건축에서 평면이 프로그램의 단순한 배치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동선과 기능이 교차·충돌하는 전략적 콜라주가 된다. 사소한 레벨 차, 하나의 램프, 중간 층, 비워진 void가 서로 다른 영역 사이의 교섭 공간으로 작동하며, 이는 이후 대형 프로그램(L)에서 훨씬 증폭된 방식으로 재등장한다. M은 거대성의 문턱 앞에서 ‘어떻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한 건물 안에 동거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스케일이다.


5p: L: Large, Bigness의 등장
● 거대 건축과 맥락 결별의 문제
L 범주에서 등장하는 것이 콜하스의 대표 개념인 ‘Bigness’이다. 에세이 「Bigness or the Problem of Large」에서 그는 일정 규모를 넘는 건축, 즉 거대 건축은 전통적 건축 원리와 다른 규칙을 갖는 새로운 종(species)이라고 주장한다. 엘리베이터, 에어컨, 철골 구조, 복잡한 설비 시스템 등 현대 기술의 발달이 건물을 수직·수평으로 끝없이 증식시킨 결과, 건물 내부는 더 이상 외형과 대응하지 않고, 파사드는 내부와 독립된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어버린다.
콜하스는 거대 건축이 “맥락(f*ck context)”과 결별한다고까지 말한다. 일정 규모를 넘는 순간, 건물은 주변 도시 조직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작은 오브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처럼 작동하는 ‘컨테이너’가 된다. 이때 건축의 과제는 더 이상 비례·장식·정합성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프로그램들이 공존하는 ‘대형 인프라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으로 이동한다. L 스케일의 건물은 도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한 단위이자 도시화의 물리적 표현으로 읽힌다.


6p: XL: Extra-Large, 도시와 초거대 스케일
● 건축과 도시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
XL은 도시, 메가스트럭처, 대규모 마스터플랜, 광역 인프라 등 건축을 넘어서는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포함한다. 이 범주에는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와 같은 유명한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 콜하스는 현대 도시가 더 이상 고전적 도시계획 이론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혼종적·우발적 구조라는 점을 강조한다.
XL 스케일에서는 건축과 도시의 경계가 무너진다. 개별 건물은 거대 복합체의 일부가 되고, 도시 계획은 개별 건축의 내부 프로그램 구성까지 파고든다. 이 지점에서 S·M·L·XL의 네 스케일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선에 놓인다. 작은 요소(S)가 집적되어 중간 규모(M)를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거대한 건축(L)을 통해 도시 인프라(XL)와 상호 작용하는 피드백 구조로 읽을 수 있다.


7p: 이론의 핵심: 거대성(Bigness)
● 스케일이 만들어내는 권력과 우발성
거대성은 단순히 “큰 건물”이 아니라, 스케일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정치적·사회적 효과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거대 건축은 규모 자체만으로 주변 도시를 압도하고, 수많은 자본·기술·정치적 힘을 한데 모으는 ‘장치’가 되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이미 권력의 표현이다. 동시에 그 내부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해관계·사용자들이 뒤엉키며, 설계자는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콜하스는 Bigness가 ‘선의의 전체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거대 건축을 “우발성(contingency)을 수용하고, 서로 다른 프로그램들이 충돌·교차하도록 설계된 컨테이너”로 이해한다. 이는 설계자가 모든 것을 선형적으로 결정하는 근대적 이상을 포기하고,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는 ‘프레임의 설계’로 건축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입장이다. 거대성의 핵심은 “규모의 폭력”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경험과 사용이 공존하도록 조직하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8p: Euralille: L과 XL 사이의 거대 인프라
● TGV 위에 세워진 도시 속의 도시
프랑스 릴 역세권 개발 프로젝트(Euralille, 1989–1994)는 TGV·지하철·도로가 교차하는 복합 교통 허브 위에 상업·업무·공공 프로그램을 얹은 대규모 복합 개발로, L과 XL 스케일이 겹치는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 프로젝트는 개별 건물이 아니라, 교통 인프라·도시 조직·건축이 한꺼번에 설계된 ‘거대한 인프라 장치’로 볼 수 있다.
Euralille은 주변의 역사 도시와 조화로운 스카이라인을 맞추려 하기보다는, 새로운 경제·교통 중심으로서 강한 인공 지형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맥락을 존중하는” 전통적 도시계획과 거리를 둔다. 하지만 동시에 교통 흐름과 도시 보행 동선을 세밀하게 매개하는 복층적 공공 공간을 조직함으로써, L 스케일의 거대 건축이 XL 스케일의 도시 인프라와 긴밀히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는 S,M,L,XL 이론에서 L과 XL의 경계가 어떻게 흐려지는지를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9p: 시애틀 공공도서관: L 스케일의 거대 컨테이너
● 비틀린 섹션으로 구현된 프로그램의 도시
시애틀 공공도서관(Seattle Central Library, 2004)은 비록 S,M,L,XL 출간 이후의 프로젝트지만, 책에서 제시된 L·Bigness 개념을 가장 명확하게 구현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콜하스는 프로그램 분석을 통해 ‘스택(Stack)’을 포함한 여러 기능 블록을 도표로 정리하고, 이를 한 건물 안에 중첩·적층하는 다이어그램 아키텍처를 제안했다. 섹션과 단면에서 보이는 비틀린 평면·경사로·보이드 구성은, 전통적 도서관의 정적인 서가 배열과 전혀 다른 ‘프로그램의 도시’를 형성한다.
시애틀 도서관의 유리·철골 파사드는 내부의 복잡한 프로그램과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랩핑(skin)처럼 작동한다. 이는 Bigness에서 말한 “외부에서 보이는 것과 내부에서 벌어지는 것의 괴리, 파사드의 독립성”을 그대로 구현한 것으로, 건물은 도시에 하나의 강력한 기호로 서 있지만, 내부는 각 층·공간마다 다른 풍경과 사용을 품는 ‘도시 속의 도시’가 된다. S,M,L,XL 이론으로 보면, 시애틀 도서관은 L 스케일 거대 건물 속에 S/M 레벨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경험이 중첩된 컨테이너이다.


10p: CCTV 본사: XL 스케일의 구조적 제스처
● 루프 구조로 뒤집은 마천루의 상식
베이징의 CCTV 본사(2012)는 초거대 규모의 방송국·오피스 복합체로, 하나의 마천루를 수직으로 쌓는 방식이 아니라, 도넛 형태의 연속 루프 구조를 통해 도시 스카이라인에 강력한 제스처를 남긴다. 이 건물은 단일 타워가 아니라 여러 기둥과 보가 연결된 거대한 링 구조로, 사용자는 건물 내부를 이동하며 “수평적 마천루”를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순환하게 된다.
CCTV는 주변 베이징 도시 조직과 완전히 다른 스케일과 형식을 취함으로써, 콜하스가 말한 “맥락을 깨는 Bigness”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내부에서 다양한 기능이 수직·수평으로 뒤엉키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작동한다는 점에서 XL 스케일까지 걸쳐 있는 사례이다. 이 프로젝트는 S,M,L,XL에서 말한 스케일의 연속성과, Bigness의 도시적·정치적 효과를 압축해 보여주는 현대 레퍼런스라고 할 수 있다.


S,M,L,XL 이후,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S,M,L,XL은 “작은 건축–중간 규모–거대 건축–도시”라는 선형 도식을 설계 매뉴얼로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콜하스는 네 스케일을 통해, 현대 건축이 다뤄야 하는 조건과 복잡성이 스케일에 따라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주면서, 건축가가 스스로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문제를 던진다. 따라서 이 이론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각 프로젝트에서 스케일·프로그램·도시의 관계를 다시 묻는 사고 도구로 활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현대 건축은 어쩔 수 없이 대형 개발, 메가 인프라, 초고층 프로젝트와 마주한다. 거대성을 단순히 거부하거나, 반대로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는 태도 모두 위험하다. 콜하스가 보여주듯, 거대성은 윤리적·도시적 문제를 동반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공공성·프로그램 혼합·도시 경험을 실험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스케일의 폭력을 인식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삶과 예측 불가능한 사용이 공존할 수 있도록 ‘프레임을 설계하는 자’로 위치를 조정해야 한다.
S,M,L,XL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완성된 해답이 아니라 모순과 우발성을 끌어안으면서도 문제를 직시하는 태도이다. 앞으로의 건축은 단일한 미학이나 스케일과 프로그램, 도시 조건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조정해 나가는 ‘조율자의 건축’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