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로 지친 당신, 잠시 이 영화 어떤가요?
INTRO
한 학기동안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하기 싫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감정이 든 적이 있지 않나요? 열심히 하다 보면 잠시 쉬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저에게 있어 영화가 그런 해결책이었습니다. 이번 아티클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잠시 동안 가볍게 혹은 레퍼런스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는 영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심신의 안정을 얻고 싶다면: 콜럼버스(2017)
영화 콜롬버스(Columbus, 2017)는 ‘건축의 도시’라 불리는 미국 인디애나주 콜럼버스를 배경으로, 공간과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겹쳐내는 영화입니다. 단순히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하는 영화가 아닌, 건축 배경 자체를 인물의 감정을 비추는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에, 건축·공간 관점에서 보면 훨씬 흥미롭습니다.
● 줄거리
젊은 여성이자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는 어머니를 홀로 둘 수 없다는 책임감이자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꿈을 미루며 작은 도시 콜롬버스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계 미국인 진(존 조)은 세계적인 건축 이론가인 아버지가 이 도시에서 갑작스레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소원했던 관계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안고 콜롬버스로 오게 됩니다. 케이시와 진은 우연히 만나 도시 곳곳의 현대 건축물들을 함께 둘러보며 서로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건축물과 도시 공간을 매개로, 각자의 상처·미래·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중요한 ‘전환점’ 같은 존재가 됩니다.

● 현대 건축물 자체가 인물의 감정을 투영하는 거울의 역할
이 영화가 독특한 이유는 건축물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케이시는 건물에서 “투명하고 정돈된 구조”를 보며 위로를 받습니다. 이는 자신의 복잡한 현실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은 아버지가 사랑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관계의 단절을 실감합니다. 건축물이 두 사람의 세대·가치관 차이를 드러내는 매개체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공간이 인물의 내면을 ‘대신 말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 대칭, 프레임, 여백을 활용한 미장셴
미장셴 영화나 연극에서 등장인물, 무대 장치, 조명, 의상 등을 활용해 연출하는 시각적인 모든 요소
감독 코고나다는 영상미로 유명한 감독이기 때문에, 영화 전체가 예술적인 ‘건축적 영상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정적이고 대칭적인 구도: 공간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하고, 인물의 고립감·정체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
* 건물을 통해 인물을 프레이밍: 유리, 구조물, 문틀 등을 활용해 인물을 ‘공간 속에 끼워 넣는’ 방식
* 여백이 많은 롱숏: 공간이 인물보다 더 큰 존재로 느껴지며, 감정의 미세한 변화가 공간 속에서 울림을 갖게 됩니다.

● 실재하는 도시 [콜럼버스]
사실 영화의 메인 배경이 되는 도시 콜럼버스는 미국에 실재하는 작은 도시의 이름입니다. 먼저, 콜럼버스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어윈 밀러 Irwin Miller(1909~2004)입니다.
어원 밀러는 디젤 엔진 등을 만드는 기업 ‘커민스’의 사장으로, 콜럼버스에 좋은 인재들을 데려오기 위해 아예 도시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재단을 설립해 콜럼버스의 공공기관 건축에 대한 비용을 부담할 것을 제안합니다. 재단에서 선정한 건축가를 선택하면 설계비를 지원했고, 그 과정에서 당대 떠오르는 많은 건축가가 등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콜럼버스는 약 30년간 60여 개의 건물을 세우며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 대평원의 아테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여한 많은 건축가 중 에로 사리넨은 영화에 등장하는 밀러 하우스, 노스 크리스천 교회, 어원 유니언 뱅크(컨퍼런스 센터)를 만든 건축가입니다. 아버지 엘리엘 사리넨 또한 건축가였으며, 두 사람 모두 미국 건축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깊은 생각을 하고 싶다면: 오블리비언(2013)
영화 오블리비언(Oblivion, 2013)은 거대한 미래적 구조물, 황폐한 지구의 잔해, 인공적으로 통제된 생활 공간 등을 통해 정체성·기억·감시·식민성(coloniality) 같은 주제를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또한 미래의 건축적인 모습을 표현한 영화이기에 창의적인 영감이 필요할 떄 보기 좋기에 추천합니다.
● 줄거리
2077년, 외계 세력과의 전쟁 후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게 되어, 생존자들은 토성의 위성 타이탄으로 이주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구에는 드론을 관리하는 기술자 잭 하퍼(톰 크루즈)와 통신 담당 파트너 빅토리아만이 남아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 둘은 기억이 지워진 채 “관리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지구로 추락한 우주선에서 줄리아(올가 쿠릴렌코)가 나타나고, 잭은 그녀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지구를 파괴한 적과, 자신들의 정체성, 그리고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조작되어 왔는지에 대한 거대한 음모가 드러납니다.

● 스카이 타워(Sky Tower)완벽한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실은 ‘감시 시스템’
잭과 빅토리아가 거주하는 ‘스카이 타워’는 유리·백색·곡선으로 이루어진 매우 세련된 미니멀리즘 건축물입니다. 하지만 건축적으로 보면 이것은 ‘주거 공간’이라기보다 일종의 감시 장치입니다.
1. 전면 유리 → 투명하지만 감시가 가능한 구조 → 개인의 사생활보다 통제와 관찰이 우선된 공간
2, 높은 고도, 단절된 위치 → 자연·땅·기억(즉, 진실)과의 단절을 상징
3. 극도로 기능화된 인터페이스와 생체 인증 → 인간의 삶이 시스템의 일부로 ‘내장’되어 있음을 보여줌
즉, 스카이 타워는 ‘깨끗함’과 ‘고립’을 동시에 상징하는 디자인된 감옥입니다.

● 지구의 폐허: 문명의 잔해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기억
영화 속 지구는 현재 주인공들이 거주하는 공간과 완전히 대비된느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 무너진 고층 빌딩
* 사막처럼 변한 도시의 골격
* 스포츠 경기장의 금속 뼈대
이 폐허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잭의 지워진 기억과 과거 문명의 파편이 맞닿아 있는 공간적 장치입니다. 특히, 잭이 과거 기억(줄리아, 뉴욕을 함께 걷던 장면)을 떠올릴 때 지구의 파편들과 겹쳐서 보입니다. 또한 건축적 폐허는 진실을 덮어버린 식민화된 미래를 보여줌→ 텍(외계 지능)이 지구를 어떻게 식민지화했는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즉, 폐허 건축은 ‘잃어버린 역사’를 상징합니다.

● 오두막을 통한 장소의 대비 및 환경보호의 상기
영화의 공간 중 가장 중요한 대비 요소는 잭이 혼자 만들어놓은 오두막 같은 장소입니다.
* 목재, 바람, 물, 녹색 식생
* 인공적 조명의 부재
* 자연광과 현실적 질감
이 공간은 자연=기억=자아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이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 남는 공간이자 기억을 보관하는 공간입니다. 즉 이 공간은 스카이 타워의 대척점에 있는 자기 복원적, 자율적 건축 공간입니다.
영화를 통해 공간적인 성질을 통한 위계적인 질서뿐만 아니라, 디스토피아 배경을 통해 다시금 환경보호를 상기시켜주는 성찰적인 영화입니다.

● 건축학과 출신 감독이 디자인한 영화 속 공간
오블리비언의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 중 하나는 영화 속 등장하는 대부분의 디자인적인 요소들이 감독 조셉 코신스키가 직접 참여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주인공 잭 하퍼와 빅토리아가 거주하는 ‘스카이 타워’, 정찰 및 이동에 쓰인 ‘버블 쉽’, 지상에서 이용하는 ‘바이크’, 무인 드론 등 건축적 공간뿐만 아니라 제품의 디자인 과정에 직접 참여였습니다.
사실, 감독은 콜롬비아대학교 기계공학 건축학을 전공한 후 직접적 건축업에 종사하진 않았지만, 영상 쪽으로 건축적인 공간을 구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이해와 창의성이 오블리비언에 잘 반영된 것 같습니다.
눈을 즐겁게 하고 싶다면: 나의 호텔 순례기(2016)
● 줄거리
감독 크리스티안 페트리(Christian Petzold 아님)는 ‘호텔’이라는 공간에 매혹되어 유럽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호텔을 순례하는 여정을 담습니다. 그는 오래된 유럽의 전통 호텔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호텔,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모더니스트 건축호텔까지 다양한 호텔을 방문하며 그 안에 담긴 역사, 건축, 사람들의 사색과 삶을 탐구합니다. 영화는 호텔이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예술가나 사색가, 여행자, 괴짜 백만장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머무는 “일시적 쉼터(임시 거처)”로서의 역할과, 현대 삶의 발전사를 반영하는 매개체임을 보여줍니다.

● 호텔의 역사성과 장소성
영화속 오래된 유럽 호텔들은 그 지역의 역사, 건축적 전통을 반영합니다. 영화에서는 이런 호텔들이 어떻게 과거의 시간성과 건축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각 호텔이 위치한 도시(또는 자연환경)와의 관계, 즉 호텔이 그 장소의 정체성을 어떻게 담고 있는지도 주목할 만합니다.
또한 영화는 단지 전통적인 고풍 호텔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 호텔까지 순례합니다.
따라서 호텔 건축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시각적으로 비교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클래식한 장식, 고전적 디테일 vs. 미니멀한 구조, 모더니즘의 기능주의 사이의 대비를 볼 수 있습니다.
● 공공 공간과 서적 공간의 경계
호텔 로비, 라운지, 식당 등 공공 구역은 사회적 만남과 교류의 공간으로 설계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이런 공간이 여행자들의 “쉼터이자 소통의 장”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반면, 객실과 복도 등 사적인 공간은 개인의 사색과 고요함을 담는 장소로 그려집니다. 이런 경계가 공간 디자인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 순례자로서의 경험성
감독의 여정 자체가 ‘공간 경험의 연속성’입니다. 호텔마다 머무르면서 공간이 주는 정서, 디자인, 기억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호텔에서 머무는 시간의 길이, 머무는 방식(단순 투숙, 라운지에서 사색, 산책 등)이 공간 경험에 어떤 깊이를 더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화는 호텔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호화로운 대상이 아니라, 예술가, 여행자, 부유층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머무는 ‘정거장’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호텔의 사회적 의미와 공간적 계층화(엘리트 호텔 vs. 소박한 호텔)의 관계를 건축적으로 성찰하게 만듭니다.
자연을 통해 위로받고 싶다면: 땅에 쓰는 시(2014)
땅에 쓰는 시 (Poetry on Land, 2024)는 대한민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의 조경과 자연, 공간성을 깊이 다루는 다큐멘터리이기에 조경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머무르는 공간을 공부하는 학부생들에게 꼭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 줄거리
이 영화는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정영선 조경가는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경춘선 숲길 등,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여러 공간을 설계하며 ‘땅에 시를 쓰듯’ 조경 작업을 해 왔습니다. 영화는 그의 사계절 현장 활동을 담아, 공간(땅)과 사람, 자연이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영화 속에는 그의 공적 작업뿐 아니라, 개인적 공간(앞마당 정원 등)부터 묘지, 도시 공원까지 다양한 조경 공간이 등장하며, 그 공간들이 인간의 탄생과 생로병사, 죽음까지 아우르는 의미를 지닌 장소로 그려집니다.

● 조경가의 “공간 설계 철학”을 보여주는 장소성
정영선 조경가는 단순히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땅이 가진 기억과 역사, 자연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설계에 반영합니다. 특히 선유도공원은 폐정수장의 구조물을 그대로 살리면서 야생 식물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과거(정수장)와 현재(공원), 자연과 도시를 연결하는 경관적 공간을 창출합니다. 이런 장소성은 단순 미관을 넘어 “땅 = 시”라는 메타포로 확장됩니다.
● 조경가와 자연의 관계성
정영선 조경가가 “땅에 시를 쓴다”는 비유를 사용하듯, 그의 일은 조경가로서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는 ‘시인’ 또는 ‘연결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영화는 그가 자연과 맺는 관계, 자연의 시간에 귀 기울이는 태도, 땅과 사람을 잇는 그의 설계 철학을 시각적으로 담아냅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조경가의 시선으로 자연을 재해석하게 되고, 땅이 단순한자원이 아니라 공존하는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 생태 복원과 지속 가능성
정영선은 폐정수장이나 폐철로 같은 버려진 공간을 단순히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연과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설계합니다. 이것은 조경을 통해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는 공간 설계의 좋은 사례입니다. 또한 조경가의 노력이 “도시의 녹색 유산”을 만든다는 메시지는, 환경 보전과 도시 개발 사이의 균형에 대해 관객에게 사색할 기회를 줍니다.

● 세대 간의 이어짐과 미래지향성
영화 말미에는 정영선 조경가가 다음 세대(손자 등)와 나무를 심는 장면이 있고, 이를 통해 조경 문화와 자연 철학이 세대 간에 전승된다는 메시지가 강조됩니다. 이는 단순한 조경 설계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조경의 미래, 그리고 땅과 사람을 잇는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조경을 제시합니다.
OUTRO
건축이 우리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듯, 건축을 영화로 풀어낸 훌륭한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설계하는 동안에 여러 번의 고비와 힘든 일이 있더라도 오늘 소개해드린 영화를 보면서 힘을 내 보는 건 어떨까요? 모두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추천드리며 이번 아티클을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