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없는 질서 : 발레리오 올지아티와 비참조적 건축

건축, 어디서 비롯되어야 하는가

건축은 늘 참조와 맥락, 이야기로 채워져야 하는가? 발레리오 올지아티는 이제 그런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는 질문한다: 우리가 진정 짓고 싶은 건축, 기댈 곳 없는 질서란 무엇일까? 전통이나 상징에 얽매이지 않고, 공간 그 자체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야심. 이 글은 단순히 올지아티의 이론과 사례만을 소개하지 않는다. “비참조적 건축”을 키워드로, 건축의 본질적 출발점과 최전선이 만나는 지점을 여러 각도에서 해부하려 한다. 건축은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스스로가 중심이 될 수 있을지 살피며 새로운 시대의 건축적 존재감에 대한 근본적 탐구를 해볼려고 한다.

 

Valerio Olgiati 의 모습 (출처 : Villa Magazine)

 

1P : 올지아티, 독립적 건축가로서의 출현

● 낯선 독립자, 발레리오 올지아티

 

발레리오 올지아티는 취리히에서 출생하여 ETH에서 수학한 뒤, 세계 건축계를 뒤흔든 파격적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거대한 건축 조류나 지역 특유의 스타일, 시대적 트렌드에 기대지 않았다. 초기부터 강한 브랜드성이나 장식적 요소 대신, 근본적으로 순수한 공간 논리에 몰두했다. 올지아티는 자신의 설계를 “다른 어떤 곳에도 기대지 않는 자립적 세계”라고 표현했다. 그의 건축에서는 일관된 재료, 명확한 구조, 추상적이고 절제된 조형이 두드러진다. 첨단 기술이나 표면적 새로움보다는 빛, 물성, 비례라는 원초적 장치들이 중심에 선다.

 

그는 도식적 맥락성에서 이탈해, 오직 건축 자체의 힘과 가능성만을 탐구하는 독립자라 할만하다. 그래서 세계는 그를 동시대 가장 근본적인 실험가, 고독한 창조자의 계보에 올려놓는다.

 

Valerio Olgiati의 Residential Building Zug Schleife 모습 (출처 : Archdaily)

 

2P : ‘비참조적 건축’이 태어난 조건

● 비참조적 건축, 새로운 패러다임

 

올지아티의 사유는 복잡한 사회 변화와 이론적 분기점을 반영한다. 그는 2010년대부터 사회가 더 이상 보편적 이상, 집단적 가치로 묶이지 않는 흐름에 주목했다. 모더니즘의 사회적 유토피아,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과 패러디 모두 붕괴되고, 오로지 “자립하는 건축”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고 본다. 이런 변화속에서 ‘비참조적 건축’은 “외부에서 차용함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공간”이란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연다. 올지아티와 이론가 브라이트슈미트는 건축을 “나 자신”으로 수렴시키는 사유적 전환에 주목했다. 비참조적 건축은 시대정신이나 현장의 맥락조차 건물 밖으로 밀어낸다. 건축가는 자신 안의 아이디어, 공간적 감각만으로 건물의 질서를 뚫어야 한다. 이로써 건축은 전례 없는 독립성과 강한 실재감을 만들어낸다. 이 철학적 전회를 통해 올지아티는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Valerio Olgiati의 비참조적 건축 (출처 : Architectura & Natura)

 

3P : 공간 경험—비참조적 건축의 핵

● 공간 경험, 비참조적 건축의 핵심

 

올지아티에겐 “공간감” 그 자체가 출발점이다. 의미ㆍ상징ㆍ서사보다, 빛의 각도, 물체의 질감, 공간의 밀도에서 건축의 힘이 시작된다고 본다. 는 익명의 재료, 과감한 비례, 극단적으로 축소된 창, 비어있는 보이드 등으로 본질적 경험을 강조한다. 용자는 신화나 설명 없이, 오직 감각적 현존을 통해 건물을 읽는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보다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느끼는가”를 묻는다. 공간은 즉각적으로 육체와 감정에 와닿고, 그 자체로 일종의 초월적 힘을 얻는다. 올지아티의 건축은 외형보다 내부 경험이 우선한다. ‘참조 없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의 새 질서를 발견하게 한다. 현대 건축이 지닌 표현력의 한계와 무한 가능성을 동시에 되묻는다.

 

K+N Residence의 plan,,모습 (출처: Archdaily)

 

4P : ‘하나됨’과 ‘새로움’—비참조적 건축의 도약

● 하나됨과 새로움: 단일성과 혁신

 

올지아티는 복잡성을 경계한다. 그의 건물은 대개 단일한 매스, 응축된 형태, 단순하지만 강렬한 프로포션을 드러낸다. ‘하나됨’은 다양한 재료나 식별자보다, 오브제로 통합된 전체성에서 나온다. 동시에 그는 반복과 차용을 거부한다. ‘새로움’은 이전에 없던 경험, 전혀 다른 공간적 질감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기존 건축의 상징 체계, 반복된 레퍼런스에서 과감히 이탈한다. 이 과정에서 건물은 복잡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단순해지고, 내적 긴장이 생겨난다. 하나됨과 새로움은 외부 참조 없이 건물 자체의 질서, 감각, 논리로만 형성된다. 이 두 원칙이 올지아티 비참조적 건축의 가장 강인한 뿌리다.

 

Baloise Insurance Company Office Tower의 plan,,모습 (출처: Archdaily)

 

5p : 모순과 질서, 의미의 탄생

● 모순과 질서, 의미 창출의 역동성

 

비참조적 건축에서 ‘모순’은 조화가 아니라 대립, 긴장, 예상치 못한 대비의 힘이다. 공간 요소 간의 이질성, 물성과 빛의 충돌, 대칭과 불균형이 하나의 건물 안에 공존한다. 이때 비로소 건물은 내적 논리, 자기만의 질서를 세운다. 질서는 표면의 심미성이나 기능보다, 건물의 아이디어와 구축방식에서 얻어진다. 이 질서 위에서만 새로운 의미, 해석의 여백이 생겨난다. 올지아티는 “건축의 의미는 거주자·방문자 집단이 새로운 경험 속에서만 도출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건축적 형식의 독자성과 해석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건축은 감각, 모순, 질서라는 세 축 위에서 존재의 깊이를 획득한다.

 

Plantahof Auditorium의 plan,모습 (출처 : Archdaily,cryptic-k)

 

6p : Plantahof Auditorium ― 공간과 존재가 만나는 자리

● 비참조적 질서와 공간의 독립성

 

Plantahof 강당은 올지아티가 스위스 플라나 지역에 설계한 문화 공간으로, 그의 비참조적 건축 철학이 잘 반영된 공간이다. 단순한 외관과 절제된 형태는 주변 환경과의 직접적 참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공간 자체의 내적 질서를 강조한다. 강당 내부는 명료한 형태와 순수한 재료로 구성되었으나,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변화가 공간에 깊은 생명력을 부여한다. 복잡한 장식이나 표정 없이도, 간결하고 견고한 공간은 개인과 집단의 경험을 한데 모으는 촉매 역할을 한다. 방문객은 이곳에서 건축 자체가 품고 있는 존재론적 실존감과 숨겨진 감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올지아티의 작업에선 공간과 그 속의 인간 존재가 눈부시게 만나는 순간이 있다. Plantahof Auditorium은 바로 그런 ‘비참조적’ 공간 경험의 전형적 예로, 질서와 자유가 조용하게 공존한다. 이 공간은 기존의 장소성 맥락과는 독립적으로, 오직 공간과 시간 속에 투영된 존재를 위해 존재한다.

 

Plantahof Auditorium의 plan,모습 (출처 : Archdaily,cryptic-k)

 

7p : yellow house ― ‘참조 없음’의 강렬한 공간

● yellow house: 비참조적 공간성의 절정

 

yellow house는 스위스 플림스 마을에 놓인, 과거 농가를 철저히 해체해 올지아티가 새롭게 설계한 박스형 건물이다. 원래 노란색이던 외관은 완전히 하얗게 바뀌었으나, ‘옐로우 하우스’라는 이름만 남아 있는 것부터 기존 건축의 기호와 기억, 맥락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외부는 전면에 창이 거의 없는 흰 직육면체 매스, 내부는 겹겹의 추상적 구조와 강렬한 빛의 반사가 특징이다. 기존의 구조, 대지 기억, 지역 맥락조차 완전히 비워낸 뒤 오직 공간감과 빛, 재료, 동선만으로 새로운 체험을 만든다. 사용자는 무엇 하나 따라 설명할 수 없는 이 압도적인 순수함에, 내적 경험에 오롯이 몰입할 수밖에 없다. 기능, 상징, 장식, 지역성—all이 제거되고 공간 자체의 물성, 빛, 공명만이 남는다. 옐로우 하우스는 ‘비참조적 건축’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며, 건축이 외부를 끊어내고 스스로의 존재감만으로 충만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 건물에서 올지아티는 건축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 해석의 여백조차 통제된 자기완결적 세계를 보여준다.

 

yellow house의 plan,모습 (출처 : afasiaarchzine,cryptic-k)

 

8p : ‘참조 없음’의 디테일—재료와 공간의 해석

● 비참조의 디테일: 재료와 빛의 미학

 

올지아티 건물의 세부에서는 주변 맥락과의 해체, 예상외의 마감과 구조가 드러난다. 적갈색 노출 콘크리트, 무의미하게 보이는 대칭, 불규칙한 빛의 유입 등이 복잡하게 작동한다. 평범한 재료도 극단적인 배치와 스케일로 전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낸다. 마감 방식, 천창, 볼륨의 단순화—all이 하나의 아이디어 아래 귀결된다. 이 모든 디테일의 초점은 외부의 응시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실존적 감각에 맞춰져 있다. 올지아티 건축의 세부는 경험마다 새로운 의미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용자는 이질감, 의문, 몰입을 넘나들며 공간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건축가는 ‘참조 없는 구축’이 새로운 감각 질서를 만드는 핵심적 도구임을 증명한다.

 

GPearling Site Museum and Entrance의 ,모습 (출처 : Archdaily)

 

9p: 고찰—비참조적 건축이 남기는 것

● 비참조 공간의 체험과 새로운 언어

 

올지아티의 공간에 처음 들어서면 압도적 현존감, 낯섦, 때로 불편함이 몰려온다. 익숙한 맥락, 이야기가 증발한 자리에 남는 본질적 울림이란 무엇일까? 비참조적 건축에서는 건물의 의미를 건축가가 미리 정하지 않는다. 대신 사용자 한 명 한 명의 감각, 흔들림, 해석이 모두 새로운 질서가 된다. 이런 건축은 때론 난해하고,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속에서 건축의 진짜 실험, 표현, 창조가 탄생한다. 나는 이 공간에서, 자신만의 해석과 감정을 누적시키는 ‘여러 겹의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다시 느꼈다. 비참조란 결국, 건축이 실재로 자립함과 동시에 사용자 경험에 의해 끝없이 완성된다는 선언이다.

 

House in Laax의 모습 (출처 : Archdaily)

 

새로운 건축가의 용기

‘참조 없는 건축’은 낯설고, 도전적이며, 때로 외롭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진정한 창조와 변혁의 뿌리가 있다. 올지아티가 던진 실천적 메시지는, “누구의 틀에도 들어가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 의미, 질서를 발명하라”는 외침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유산에 기대지 않고, 매 순간 완전히 새로운 건축을 상상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실험의 끝에는, 사용자의 감각, 질문, 실존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남는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건축가는 ‘비참조적 태도’로, 늘 처음처럼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자이다. 이는 개인적 상상력을 예찬하는 동시에, 동시대 건축의 미래를 묻는 날카로운 물음표다. 참조 없는 세계에서, 우리의 설계는 또 어떤 이야기와 감각을 품어낼 것인가? 이 질문에서, 건축은 다시 출발한다.

 

paspels school의 모습 (출처 : arche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