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의 작은 도시, 페즈
INTRO

한남동의 어느 주택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도시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파사드의 존재감은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자연스럽게 이끌리도록 한다. ‘페즈(FEZH)’라는 이 건물은 사람들에게 일상과 다른 리듬을 건네는 한남동의 한 공간이다.
페즈(FEZH)
– 서울특별시 용산구 대사관로 11길 41
– 운영: 화-일 11:00-19:00, 월요일 휴무
– 홈페이지: https://www.instagram.com/fezh.hannam/
팔로워 4,896명, 팔로잉 3명, 게시물 597개 – FEZH 페즈(@fezh.hannam)님의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보기
‘페즈’라는 도시를 닮은 커뮤니티몰


‘페즈’는 모로코의 가장 오래된 도시인 ‘페즈 올드시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열 채의 집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빵집과 우물을 공유하는 구조를 가진 이러한 최소 단위의 도시는 한 구석을 보아도 전체를 알 수 있는 다원적 민주주의 표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데, 한남동의 ‘페즈’ 역시 이러한 도시 개념에서 출발했다. 카페, 광장, 갤러리, 음악과 라이브러리, 요가와 티(Tea) 그리고 주말 마켓까지. 도시의 필수적인 커뮤니티 기능을 한 곳에 남아낸다. 이 모든 요소는 하나의 키워드인 ‘치유’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도시 ‘페즈(Fez)’와 힐링(Healing), 한남동(Hannam Dong)을 의미하는 H를 더해 지어진 FEZH는 결과적으로 도심 속에 구현된 최소 단위의 도시이자 머무는 이들을 회복시키는 작은 공동체가 된다.

페즈는 상업적 기능을 넘어서 누구나 이곳에 머물고, 걷고. 대화할 수 있는 도시 속 작은 무대를 제공하고 있었다. 입구의 광장과 루프의 정원, 그리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어우러지며 사람들은 소비자가 아닌 참여자가 된다. 공간의 문턱을 낮춰 지역 주민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주말이면 작은 시장이나 전시가 열려 동네와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건축은 화려한 제스처보다는 재료 본연의 힘을 드러낸다. 유이화 건축가가 설계한 이 공간은 벽돌과 나무가 중심을 이루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 깊어질 질감을 의도했다. 벽돌의 미묘한 색감과 나무의 질감은 골목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계단과 창의 틈새는 걷는 이들의 시선을 유도한다. 건물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 보다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삶을 부드럽게 떠받치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배우는 머무름의 속도
직선적인 입, 출구 동선보다는, 복도와 단차, 작은 방과 마당이 이어지며 걷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탐험가가 되게 한다. 예상치 못한 코너에서는 전시나 작은 숍을 발견하기도 했고, 창 너머로 보이는 한남동의 장면은 마치 액자처럼 들어오기도 한다. 이 공간을 걷는 동안의 경험은 발견에 가까웠다. 잠시 머물러 앉을 때, 도시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지고 새로운 리듬이 감각을 깨웠다.

달라이 라마의 생활 지침서에 적힌 문장, “Be Gentle With the Earth”는 페즈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간이 추구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지구와 타인, 동물, 그리고 나 자신까지 아끼고 존중하자는 메시지다.
이 정신은 곧 이용객을 대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페즈는 규칙으로 사람을 구분하기보다, 누구나 편히 머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화장실, 반려견과 함께 앉을 수 있는 카페, 다양한 연령대를 고려한 가구 배치까지—작은 배려들이 모여 섬세한 환대가 완성된다.
그렇게 이곳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서로를 이어주는 작은 공동체의 도시로 기능한다.
공간을 이루는 네 개의 장면
• 카페 미나앤폴(Mina&Paul) – B2F
페즈의 입구 파사드는 도심 속에서 단번에 시선을 붙잡는다. 입체적으로 열리고 겹쳐지는 개구부는 마치 낯선 도시의 골목 초입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발걸음을 안으로 옮기는 순간, 그 긴장은 곧 부드럽게 풀린다. 파사드가 낯선 여행의 문이라면, 카페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 호흡을 고르게 하는 작은 쉼표 같은 공간이다.
‘미나앤폴’은 지역과 친밀히 연결된 카페로,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고 다양한 음료가 마련되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풍경은 반려견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 장면은 서울의 한복판, 한남동 골목에 자리한 건물에서 마주하기에는 다소 낯설고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일상의 틀 안에서 불쑥 피어난 여행 같은 순간이었다.


• 뮤직바 블루캣(Blue Cat) – B1F

카페를 뒤로하고 슬로프를 따라 올라온 지하 1층에서는 문 틈사이로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이 먼저 반긴다. 누구라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음아게 취해 함께 어우러지고 싶어질 만큼 매혹적인 울림이다. 이곳에서는 사회적 지위도, 내가 누구인지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음악 그 자체에 몸을 맡기는 경험만이 남는다면 페즈가 지향하는 가치가 선명해진다. 이용객 모두에게 열려있는 편안함, 서로를 이어주는 어우러짐,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몰로서의 정체성이 이 뮤직바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 갤러리(Gallery) – 1-2F
인상적이었던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계단형 의자가 창 너머로 보인다. 창문에는 역시 ‘Be gentle with the Earth’라는 구절이 쓰여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길을 사로잡는 회화작품들이 곳곳에 걸려있었으며, 한 곳에는 작은 체스판이 놓여있다. 또한 계단형 의자를 따라 올라가보면 2층 갤러리 중앙 부분에는 거대한 체스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각적 경험가 사유가 동시에 펼쳐집과 더불어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고 시간을 머무르며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만들어진 셈이다. 방문했을 당시에 실제로 두명의 관람객이 고심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거대 체스 조형물을 가지고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교류와 몰입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순간의 사유가 지하의 공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듯한 공간이다.
• 티 하우스(Tea House) / 리셉션(Reception) / 헤븐(Heaven) – 3F
2층 갤러리를 지나 3층까지 훤히 뚫린 보이드 위로는 3층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헤븐’이라는 이름을 가진 옥상 정원이었다. 포켓 가든같은 형식으로 설계된 이 곳은 도심 속 작은 생태 공원을 떠올리게 한다. 빽빽한 건물들 사이에서 오아시스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원으로 나가기 바로 전에는 ‘티하우스’가 있었다.


정갈하게 놓여진 티 설명은 옥상 정원으로 나서기 전에 사람들의 사유를 한 층 더 끌어올리기 적합한 티를 제공한다. 발리 등 여러 나라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주가 지향하는 지점이 잘 보여지는 점이다. 3층에서 티를 마시며 옥상 정원을 감상하고 사람들이 고요 속에서 사유하길 바랬던 것이다. 입구에 쓰여져 있던- 페즈가 도심 속 힐링 공간-이라는 설명이 이제야 더욱 이해가 된다.
• 까사 델 아구아(Casa del Agua) – 4F
리트릿 스페이스라고 소개된 이 공간은 ‘리트릿’이라는 말 처럼 현대인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짦은 여행을 제공하기 알맞은 장소로 보여졌다. 명상과 요가가 주된 프로그램이 되는 공간으로, 물의 흐름과 자연의 요소를 차용해 깊은 몰입을 유도한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잠시 도시의 시간을 벗어나 자신만의 내면적 리듬을 회복할 수 있다.
OUTRO
한남동의 속도와는 조금 다른 박자로 흐르는 장소인 페즈는 특별한 기념비도, 화려한 무대도 아닌 그저 도시 한가운데 놓인 작은 쉼표이자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마디가 되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를 수 있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말을 건내는 듯한 장소- 그것이 페즈가 지닌 가장 큰 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