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함캠퍼스: 빈 상자, 가능성의 공간

INTRO

 

경기도 양평 남한강 변, 울창한 숲과 드넓으 들판이 맞닿은 곳에 이함캠퍼스가 자리한다.

이함캠퍼스를 찾았던 날은 눈이 조용히 내리던 겨울이었다. 흰 눈은 건물의 윤곽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모든 경계를 부드럽게 지웠다. 직선적인 구조와 절제된 매스 위에 쌓인 눈은 이 공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긴장감을 잠시 누그러뜨렸고, 캠퍼스 전체는 마치 하나의 정적인 장면처럼 고요하게 멈춰 있었다.

 

 

이곳은 흔히 접할 수 있는 미술관이 아닌, 이름부터 빈 상자(Empty Box), 그러니까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는 공간의 생성기이자 태도로서 이함캠퍼스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이함’을 한자로 풀이해보면, 써 이(以) + 상자 함(函)

목적 없이 비워둔 상자를 의미한다.

 

어떠한 단일 정답을 향해 설계된 공간이 아닌, 관람자-작품-사건들이 들어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열린 상자다.

 

이함캠퍼스 / 카페 페니키아

– 경기도 양평군 강남로 370-10

– 운영: 화-금 10:00-18:30, 주말 10:00-18:30, 월요일 휴무

– 홈페이지: https://www.ehamcampus.com/

– 가에타노 페세 가구전: 2025.09.13-2026.09.27

 

 

긴 시간, 느슨한 시작 – 미완의 완성

이함캠퍼스가 지금의 모습으로 열린 것은 2022년이지만, 설계가 처음 시작된 시점은 1997년경이라고 전해진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이 공간은 미술관이라는 이름만 달리며 비어 있었다. 설계를 담당한 김개천 건축가는 이 시간의 여백을 오히려 공간의 본질에 덧붙여,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사용될 가능성을 지닌 구조로 만들고자 했다.

 

이함캠퍼스는 약 1만 평의 부지 위에 9개의 건물과 정원, 연못 등을 품고 있다.

주변 지역과의 관계는 수평적이고 확장적이다. 건물간의 시선 이동, 중정을 통한 열린 통로, 자연광과 그림자의 변화 등은 단순히 건축적인 장식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매개채로 설계되었다.

 

 

전시장과 중정, 복도를 오가며 마주하는 풍경은 계절이 공간 경험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는지를 체감하게 했다. 눈 덮인 중정은 전시의 일부로 작동했고, 창 너머로 보이는 설경은 전시장에 놓인 작품 못지 않게 시선을 붙잡았다. 계절은 언제나 공간 안으로 스미고, 전시의 분위기를 함께 결정한다는 것에 공감했다.

 

 

이곳 이함캠퍼스는 계절을 통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날씨와 시간, 자연의 변화는 건축과 전시위에 덧입혀지는 우연이 아니라, 이 공간이 의도적으로 허락한 구성 요소다. 같은 전시라도 방문하는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는 이유다.

 

전시의 또 다른 층위ㅡ가에타노 세페

이함캠퍼스에서는 현재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 건축가 가에타노 페세의 가구전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가구를 기능적 도구나 조형물 중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 대신 형태의 불균질함과 재료의 유동성으로 통해 사용과 해석이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둔다.

 

페세는 반복과 규격화르 전제로 한 디자인 언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온 디자이너로, 그의 가구는 동일한 형태로 복제되지 않고 각기 다른 색과 밀도, 표면을 지닌다. 이는 완성도를 낮추기 위한 선택이 아닌 시간과 제작 과정, 개별성을 디자인 안에 포함시키기 위한 방식에 가깝다.

 

 

이함캠퍼스의 전시장 구조는 이러한 작업을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중정에서 들어오는 자연광과 절제된 벽면, 여백이 많은 동선은 페세의 가구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공간의 흐름에 놓이게 했다. 관람자는 가구를 감상하는데 멈추지 않고, 형태와 비례를 통해 사용을 전제로 한 신체적 상상을 하게 된다.

 

특정한 생활 장면이나 사용 방식을 제시하지 않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가구는 하나의 답으로 제시되지 않고, 각자의 경험과 맥락을 투영할 수 있는 상태로 남겨진다. 이는 이함캠퍼스가 전반적으로 취하는 태도, 즉 비워두고 규정하지 않는 방식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조경과 구조, 그리고 시간성

캠퍼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경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부터 빼곡히 심어진 나무들과 연못 그리고 산책로는 자연과 인간이 별도의 층위에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듯 하다. 김개천 건축가의 설계는 이러한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전시장 내부에도 중정이 있어 계절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공간 경험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또한 김개천 건축가의 작품은 흔히 경험의 연장선으로서의 공간을 설계한다는 평을 받는다. 구조가 정답이나 중심을 강요하지 않고, 사용자의 움직임과 환경의 변화를 포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함캠퍼스의 건물들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관계의 장을 형성하는데, 이는 장면과 서사의 조합과 같이 체험적 건축을 이끈다.

 

 

이함캠퍼스를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 카페 페니키아다.

일반적인 카페와는 달리, 이곳의 카페는 미술관을 통과하는 중간지점이 아닌, 체류의 목적지로서의 장소로 자리한다.

 

넓은 창을 통해 보이는 자연 풍경은 카페의 가장 큰 자산이다. 내부 공가는 심플하고 세련된 재료로 마감되어 있지만, 시선은 언제나 밖으로 흐른다. 운치있는 연못과 숲, 계절의 색감은 커피잔 옆 풍경이 된다. 자연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이곳에 잠시 머무를 이유가 된다.커피 잔을 손에 쥔 채 창 밖을 바라보거나, 말없이 공간에 앉아 있는 행위 자체가 자연스럽다. 이곳에서는 무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허용된다.

 

 

카페 페니키아는 좌석간의 간격에 충분한 여백이 있어 머무는 이들에게 사적인 체험을 보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개인적이지도 않다. 각자의 고요한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느슨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는 이함캠퍼스가 지향하는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공간’의 태도가 구현되는 지점이었다.

 

 

결국 카페 페니키아는 이함캠퍼스의 철학을 가장 부드럽게 번역한 공간이다. 건축적 사유는 여기서 일상의 감각으로 스며들고, 방문객은 특별한 설명 없이도 이 장소의 태도를 체득한다. 커피를 마시며 머무는 짧은 시간 속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다.

 

OUTRO

이함캠퍼스를 둘러본 뒤 남는 것은 강한 인상이라기 보단, 몇 가지 장면에 대한 기억이다. 눈이 쌓인 중정,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던 빛의 방향, 카페 페닠키아에서 창 밖을 바라보던 시간 같은 것들이다. 이 공간의 경험은 감정적으로 과장되기 보다, 차분하게 축적된다. 전시장과 카페는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지만, 공통적으로 관람자의 속도를 존중한다. 동선을 강요하지 않고, 체류를 서두르지 않게 만든다. 이함캠퍼스가 하나의 완결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간은 해석을 유도하지만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시는 공간에 기대고, 카페는 그 경험을 일상으로 이어주며, 이함캠퍼스와 카페 페니키아는 그렇게, 조용히 머물다 나올 수 있는 장소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