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의 흐름으로 보다 : 자전거의 도시 코펜하겐
- 발행
- 2026.10.21
INTRO
▲칼레보드 관측탑 근처에서 잠깐 멈추기
코펜하겐 사람들은 자전거를 사랑한다. 자전거는 빠르고 편리하며, 건강하고, 심지어 환경 친화적이기까지 하다. 자전거와 차량 도로 체계가 공존할 정도로 자전거를 권장하고 있다. 1편에서 걸어서 이 도시를 돌아봤다면, 2편에서는 조금은 더 빠른 두 바퀴의 흐름에서 구도심 밖의 다양한 현대건축물을 소개한다. 자동차보다 친밀하고 보행자보다 역동적인 자전거의 시선에서 코펜하겐이 도시 건축의 팽창 방향을 어떻게 제시해 왔는지 알아보자.
항만에서 시작해서 신도시까지
대부분의 숙박시설에서 하루 요금으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자전거 전용 도로와 전용 신호가 있으므로 그 체계에 따라 안전에 유의하며 자전거의 도시를 느껴보자.
●오페라파크(Operaparken)


▲오페라 파크 진입부와 카페 진입부
코펜하겐의 복잡한 자전거 도로를 타고 항만 가로를 달리다 보면, 거친 부두 사이에 거짓말처럼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콘크리트 인프라와 삭막한 항만 사이에 섬처럼 조성된 오페라 파크다.
이 공간의 백미는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마주하는 조경에 있다. 철저하게 숨겨진 지하 주차장 인프라 위에,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유기적인 녹지를 얹어냈다.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풍성한 녹음은 자전거를 타며 땀 흘린 보행자들과 시민들이 언제든 쉬어갈 수 있도록 유연하게 열려 있는 친환경 도시 거실이다. 바로 옆의 오페라 하우스는 웅장한 지붕을 뽐낸다면, 오페라 파크의 메인 카페는 주변 식생과 조화를 이루며 낮고 긴 처마를 통해 생긴 그늘과 함께 사람들의 진입을 유도한다.
● 티에트겐 학생 기숙사(The Tietgen Residence Hall)

▲기숙사 외관과 기숙사 안뜰
구도심을 빠져나와 주거단지 사이를 지나며 코펜하겐 대학교로 향했다. 밖에서만 봐도 특이하게 생긴, 원형 놋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독특한 건축물을 마주하게 된다. 중국의 전통 주거인 토루에서 영감을 얻은 티에트겐 학생 기숙사다.
캠퍼스의 정중앙에서 원형 배치를 통해 캠퍼스 어느 곳이든 빠른 연결을 보여준다. 내부는 외부에서 알 수 있듯이 방이 네모반듯하지 않고, 바움쿠엔 조각들을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 기숙사는 공동체 생활을 독려한다. 조각들이 쌓여 하나의 도넛을 만든 것처럼, 상층부가 주로 주거라면 저층부는 주로 공용 공간을 두어 학생들이 방에만 있지 않고 공동구역으로 모이게 유도한다. 직접 갔을 때는 도넛 안쪽의 안뜰만 볼 수 있었으나 공식 홈페이지에서 내부 가이드 투어를 예약할 수 있다.
● 8 하우스(8 House)


▲8하우스 외부 및 내부 전경
8하우스가 위치한 외레스타드(Ørestad) 지구는 한창 도시 개발이 진행 중인 곳으로, 도심보다 공항과 자연보존지구에 더 가까운 외곽 지역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동하면 주거시설, 스포츠 센터, 대형마트 등 현대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에 대한 실험작들을 파노라마처럼 목격할 수 있다.
외레스타드의 황량한 지평선 끝에서 마주한 8하우스는 BIG가 제안하는 입체적 주거의 결정판이다. 이 건축물은 숫자 8의 형태로 매스를 비틀어 두 개의 내밀한 중정을 형성하고, 주거와 상업, 그리고 커뮤니티라는 이질적인 프로그램을 단일 매스 안에 수직적으로 엮어냈다. 이 공간의 백미는 건물의 외곽을 따라 10층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사 보행로다. 자전거는 잠시 지상에 묶어두고 느린 걸음으로 이 경사로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지상의 골목길이 수직으로 연장된 입체적 가로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길 위에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시선을 교차하고 인사를 나누며, 평면적인 아파트 커뮤니티를 삼차원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 칼베보드 펠레 관측탑(Observation Tower in Kalvebod Fælled)

▲관측탑 전경과 관측탑 하부 구조
다음 목적지를 가던 중 지나치게 되는 칼베보드 펠레 자연보존지구의 흙길을 따라 자전거를 달리다 보면, 거친 자연의 텍스처 속에 부드럽게 솟아오른 관측탑을 만나게 된다.
스케일 큰 덴마크의 평원 속에서 이 작은 건축물은 인공적인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목재 루버로 둘러싸인 이 탑은, 건축이 어떻게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찾아온 인간의 행위를 포용할 수 있는지 조용히 웅변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막혀 있어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나무 판재 뒤로 숨은 철제 계단의 구조미가 엿보이는 건축물이었다.
구도심의 시간을 지나, 도심 인프라의 유쾌한 반전까지
● 덴스케 뱅크(Danske Bank Erhverv)

▲유연한 곡면 내부 중정과 다른 진입부에서 본 계단
길고 긴 평원을 벗어나 다시 도심 항만 지구로 진입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건물의 입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대부분 주거 건물이라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평범하게 생긴 임대 사무실 건물에서 유연한 곡선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코펜하겐 라이카 스토어에서 만난 건축학도 직원의 추천으로 향했던 이곳은, 사실 외부에서 보았을 땐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매스를 두 개로 쪼갠 것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 생각은 내부에서 완전히 달라진다. 유연한 곡선들로 감싸져 있는 중앙을 탁 트이게 둔 내부 중정형의 건물이었던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원으로 되어있는 천창은 곡면으로 처리된 슬라브와 연결된다. 사무실 건축은 엄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유연하고 유쾌한 일터의 반전이었다.
● 덴마크 공립 도서관(Copenhagen Main Library)

▲출입구에서 보이는 에스컬레이터와 목재 박스와 2층에서 진입부 방향 시선
잠깐 다시 코펜하겐 구도심으로 돌아왔다. 이 또한 그 친구에게 추천을 받아온 곳으로, 이 공간은 코펜하겐이라는 도시가 축적된 시간과 기존 건축물을 대하는 지향점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수세기의 시간을 견뎌온 클래식한 외피와 구체 프레임은 단정하게 유지하되, 그 내부를 완전히 비워내어 현대적인 공공 공간으로 대담하게 재탄생시킨 것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천창에서 쏟아지는 온화한 빛 아래, 중앙을 시원하게 지르는 에스컬레이터와 중정을 둘러싼 정갈한 목재 프레임의 입체적 오프닝들이 반전처럼 펼쳐진다. 겉과 속의 대담한 대비 속에서 시민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유연하게 이동하고, 박스 형태의 틈새 공간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일상을 공유한다. 섣부른 철거와 신축 대신,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존중하면서 내부의 행위를 완벽하게 재생시켜 내는 코펜하겐식 리노베이션의 단단한 진수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 코펜힐(CopenHill)

▲도심정원에서 본 코펜힐과 코펜힐 정상으로 가는 길
다시 페달을 밟아 도심 공업 지구의 스카이라인으로 향하면, 거대한 메탈 매스 위로 연기를 뿜어내는 기묘한 경사면이 눈에 들어온다. 기피 시설인 쓰레기 소각장 상부를 시민들의 스키장과 하이킹 코스로 반전시킨 코펜하겐 자전거 기행의 최종 종착지, 코펜힐이다.
Bjarke Ingels가 주장하는 쾌락적 지속가능성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웅변하는 이 건축물은, 환경 보호와 인프라 시설이 더 이상 지루하거나 혐오스러운 대상이 아님을 증명한다. 악취 대신 시민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채워진 인공 경사면 아래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 올라가다 보면, 건축이 도시의 인프라를 얼마나 유쾌하게 재해석할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형태의 파격을 넘어, 행위의 반전을 이뤄낸 코펜하겐 현대 건축의 상징이다. 늦게 도착해 걸어서 정상까지 올라가면서 건물의 옥상면을 단순한 슬로프로 하는 것 이상으로 조경을 식재하여 진짜 언덕처럼 만들려고 한 건축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 BIG 본사

▲본사 내부를 가로지르는 계단과 식당에서 출입구 쪽 사진
페달을 밟아 닿은 자전거 기행의 끝자락, 북항부두의 거친 공업 지대 속에 자리 잡은 BIG의 새로운 본사를 마주했다. 8하우스부터 코펜힐까지, 코펜하겐 곳곳에 기분 좋은 파격을 심어온 그들의 건축이 과연 어떤 공간에서 잉태되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사옥 내부는 단정한 오피스 보다는 도시 전체를 축소해 놓은 거대한 입체 작업실에 가깝다. 육중한 노출 콘크리트 보와 층을 넘나드는 블랙 철제 지그재그 계단은 층 간의 경계를 허물고 수직적인 소통을 유도한다. 네온사인이 밝히는 라운지 테이블과 바닥 곳곳에 무심하게 놓인 수많은 스터디 모형들은, 코펜하겐이라는 도시와 BIG이 공유하는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건축을 엄숙한 기념비가 아닌, 도시의 제약과 시민의 일상을 유쾌하게 결합하는 ‘실용적 유토피아’로 바라보는 시선. 그 자유로운 에너지와 실험 정신이 바로 지금의 역동적인 코펜하겐을 짓는 가장 단단한 원동력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OUTRO

▲코펜하겐
자전거 바퀴가 멈춘 코펜힐 슬로프 정상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도심 속 작은 정원부터 파격적인 현대 건축물까지 이 도시가 자전거 위에 올라탄 나에게 보여준 현대 건축의 흐름은 명확했다. 그들은 건물의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자전거에서 내려 인간이 어떻게 걷고,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자연과 인프라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행위’에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그 행위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의 건축을 지향한다. 자전거의 건강한 속도로 담아낸 코펜하겐의 풍경은, 결국 건축이란 형태적 유희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바탕이라는 사실을 묵직하게 전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