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격자: SANAA가 창조한 유동적 공간의 언어
질서와 자유의 경계에서
건축은 늘 틀에 갇혀야 했을까? 오래전부터 건축의 세계는 ‘질서’와 ‘자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질서를 제공하는 ‘그리드’는 구조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창의적 변주를 허락하는 도구였다. 본 글에서는 건축의 기본 기법이자 오랜 언어인 ‘그리드’가 현시대에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고, 그 중에서도 일본의 대표적 건축 듀오 SANAA(Sejima and Nishizawa and Associates)는 전통 그리드의 엄격함을 해체하고, 투명함과 흐름, 사용자의 경험을 본질에 놓으며 새로운 공간 언어를 만들어 냈다. 이 글은 SANAA의 건축 공간들을 통하여 건축 기법인 그리드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지, 그리고 왜 각자의 ‘색깔’이 중요한지 탐구한다.

1P : 구조의 언어, 그리드 Grid
● 건축의 토대, 그리고 무한한 해석의 시작
그리드는 건축에서 평면, 입면, 단면의 틀을 잡아주는 최소 단위이자, 공간과 형태를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설계 도구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리스식 신전, 르코르뷔지에의 모듈러, 근대주의 고층 빌딩까지, 그리드는 질서와 비례, 반복과 변형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토대였다. 가장 기본적인 그리드의 목적은 구조와 안정, 그리고 합리적 배치를 위한 것이다. 건축가는 그리드를 통해 주어진 대지와 자원의 제약 속에서도 조화와 균형, 유연성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리드는 곧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초안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더라도, 실제로는 구조적 제한과 기능적 명확성이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드는 단순한 ‘격자’가 아니라, 건축과 삶에 꼭 필요한 최소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2P : SANAA: 그리드 위에 얹은 투명한 무한
● 규칙과 유연함의 미묘한 균형
SANAA는 카즈요 세지마(Kazuyo Sejima)와 류에 니시자와(Ryue Nishizawa)가 이끄는 일본의 건축설계 사무소로, 매끈하고 투명한 외피, 자유롭게 흐르는 내부 공간, 구조와 경계의 모호함 등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수많은 현대 건축가들이 ‘그리드’ 위에 변화를 더했다면, SANAA는 기존의 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드를 “의식적이면서도 유연하게” 해체하거나 재구성했다.
이들은 평면 속 그리드를 엄격히 따르는 동시에, 그 안에서 벽의 위치, 개구부, 경사진 바닥, 여러 공용 공간들이 흘러가듯 배치되게 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격자’를 인식하면서도, 결코 폐쇄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흐름을 경험한다. SANAA의 대표작에는 항상 그리드가 존재하지만, 그 존재는 유연함과 자유로움으로 투명하게 감싸져 있다.

3P: 21st century museum: 다각형 모듈과 열린 질서
● 격자 위의 유기적 공간 흐름
21st century museum은 원형 기하 위에 사각형, 삼각형, 원형 등 형태가 다양한 투명 박스 전시실이 절묘하게 흩어져 있다. 겉으로는 질서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5m 정방 그리드가 평면 전체를 통제한다. 각 전시실은 격자 모듈에 맞춰 기능·용도가 고유하게 자리를 잡으며, 격자와 격자 사이에는 마치 거리나 광장 같은 공공성이 흐른다. 유리 외피와 구조 그리드가 결합되어, 도시와 전시, 일상과 미술이 경계 없이 연결되는 새로운 공간 언어를 만든다. 관람객은 자신도 모르게 그리드 위를 걷고, 기법이 자연스럽게 일상의 경험으로 스며들게 된다.


4P: Rolex Learning Center: 곡선 속 그리드의 해방
● 정형 그리드 위에 흐르는 유기적 곡선
스위스 Rolex Learning Center는 건물 전체에 적용된 직선 기둥 그리드 위에 부드럽고 연속적인 곡선을 얹어 격자의 경계를 허문다. 평면 구조는 사실 엄격한 기둥 그리드 위에 놓이지만, 위로 올라오면 곡면의 연속적 흐름과 언덕, 계곡 등 다양하게 변화하는 단차가 나타난다. 공간의 구획은 직선 그리드로 통제되지만, 곡선 벽과 천장이 이를 해체한다. 학습과 휴식, 모임과 사색의 장소가 끊임없이 연결되고, “움직임의 자유로움과 구조의 명확함”이 서로를 완화시켜 건물 전체가 하나의 광장, 도시처럼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격자가 어떻게 공간을 새롭게 확장하는지 잘 보여준다.


5p: Le Louvre Lens: 선형 격자와 민첩한 공간 배열
● 균형과 리듬 사이의 조정자
긴 직사각 평면을 가진 Le Louvre Lens의 360m 길이의 긴 수평 공간은 실제로는 세부 격자 안에 프로그램별로 작은 공간들이 박혀 있다. 복수의 전시관과 서비스 공간이 투명 플랜으로 연결되고, 평면 격자 위에 곡선 형태의 복도·가림막이 자유롭게 얹혀져 경직된 질서를 완화한다. 건물 외피는 반사 알루미늄과 유리를 혼합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리드는 위계 없는 공간 흐름과 사용자의 자유로운 동선을 이끌어내며, 미술관 전체가 열린 도시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6p: New Art Museum NY: 볼륨의 분절과 그리드의 반복
● 반복 속 변주의 미적 긴장
New Art Museum NY은 7개 박스형 볼륨이 수직적 구조 그리드를 따르면서도 각 층마다 달리 어긋나 배열된다. 구조 그리드는 외형적 질서를 부여하지만, 층간 움직임과 내부 공간 조직은 다양하다. 그리드의 반복과 각 볼륨의 미묘한 차이, 시점의 변화는 ‘동일한 질서 속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만든다. 관람객은 결국 단일한 그리드로 설계된 건물에서 자신의 동선과 시선을 반복적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질서·불규칙·다양성의 균형을 이룬 대표작이다.


7p: music at mit:: 창조와 소통의 무대
● 격자에 담긴 음향과 동선의 질서
MIT 캠퍼스에 위치한 이 시설은 1.2m 격자 구조로 외관을 구성했으며, 세 개의 큐빅 볼륨으로 나뉘어 각각 공연장, 연습실, 교육 공간을 담는다. 내부에서는 격자 구조가 세밀하게 해체되어, 다양한 음향 환경과 사용자 동선을 고려한 개별 공간들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SANAA는 강한 질서 속에서 유연한 공간을 만들어내며, 그리드가 창의적 만남과 표현을 촉진하는 기반임을 보여준다. 이곳은 기술적 정확성과 예술적 감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음악과 퍼포먼스가 빛나는 ‘창조의 실험장’이다.


8p: Glass Pavilion at the Toledo Museum of Art: 투명한 격자의 무한 확장
● 유리와 곡면의 중첩, 그리고 공간의 비가시성
Glass Pavilion at the Toledo Museum of Art은 SANAA가 유리와 그리드로 구현한 극도의 투명성과 공간 실험의 결정체다. 7m x 7m 그리드 위에 둥근 유리벽이 불규칙하게 겹쳐지고, 각기 다른 곡률을 가진 유리 파티션이 경계·방향성을 지운다. 내부 공간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겹침·회절·투과 등을 통해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드는 실재적 구조이자 동시에 무한히 유동하는 경험의 지도다. 사용자는 “공간의 틀을 넘어서는 무한한 확장감, 투명한 경계”에서 건축의 본질을 다시 묻게 된다.


9p: 색깔로서의 그리드: 반복, 차이, 그리고 개성
● 복제 대신 창조: 미묘한 변주의 힘
건축에서 그리드는 한때 ‘기준’의 상징이자, 창의성의 한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SANAA는 그리드를 단순 반복이 아닌, 개별 공간에 고유한 성격이 채워지는 ‘무대’로 바꿔 놓았다. 이들의 작업을 보면, 반복과 차이가 동시에 진행되고 각 공간이 별도의 기능과 분위기를 가지지만, 격자가 구심점 역할을 하며 전체 작품의 일관성을 형성한다.
여기서 건축가에게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주어진 그리드를 어떻게 자기만의 색깔로 바꿀 것인가?” 단순 복제는 금세 식상해지지만, 미묘한 각도 차, 하나의 열린 벽, 투명/불투명 소재의 선택 등으로 공간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만의 격자를 찾아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이미 누군가가 짠 질서, 틀, 그리고 격자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에서 우리 각자는 시작하며, 한 줄 한 줄, 한 칸 한 칸을 채우는 일이 건축의 시작이다. 그러나 진정한 건축가는 단순히 주어진 격자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그 틀에 변주를 가하고, 평면에 이야기를 새기며, 자신의 색깔로 그리드를 물들인다.
SANAA는 이 긴 여정에서 질서 속에 감춰진 자유를 발견했다. 반복 속 차이를 만들고, 기법 속 새로움을 응시했다. 그들의 건축은 세계 곳곳에 흐르는 보편적 언어이자, 동시에 독창적 예술이다. 그들의 건축처럼 우리 각자도 고유한 ‘자기만의 그리드’를 찾길 바란다.
그리드를 해체하고, 다시 짜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공간에 새겨 넣는 그 과정 그것이 바로 건축의 가장 깊은 즐거움이며, 이 글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손끝에서, 또 다른 질서와 자유가 태어나길,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넓어지길 기대한다.
당신만의 격자 위에 펼쳐질 독창적 세계가, 결국 건축의 미래를 빚어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