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도 방학 가이드 ①: 저학년, 뭘 하면 좋을까?

INTRO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친 건축학도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설계 프로젝트와 과제, 시험까지 정신없이 지나가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방학이 찾아왔습니다. 종강 직후에는 분명 쉬고 싶은데, 막상 아무것도 안 하자니 불안한 마음도 듭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저학년 건축학도가 방학 동안 해보면 좋을 활동들을 답사, 독서, 강의, 기록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번 방학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 글을 가볍게 참고해보셔도 좋겠습니다.

 

1. 답사 : 공간을 몸으로 경험하기

저학년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방학 활동은 답사입니다. 건축을 공부하다 보면 도면, 모형, 렌더링처럼 책상 위에서 공간을 다루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실제 공간은 화면이나 도면만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의 분위기, 계단의 폭, 천장의 높이, 빛이 들어오는 방향, 사람들이 머무는 방식은 직접 걸어보고 느껴야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직접 마주하며 쌓는 건축적 감각

 

처음부터 거창한 해외 건축 답사를 계획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내에서도 충분히 좋은 답사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서울만 보더라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문화비축기지, 세운상가, 서촌과 북촌, 성수동 일대처럼 건축과 도시를 함께 볼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명한 건축물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무엇을 봤고 무엇을 느꼈는지 스스로 정리해보는 것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외부(왼쪽) 국립현대미술관 내부 (오른쪽)

 

특히 서촌, 북촌, 성수동처럼 흔히 ‘핫플’이라고 불리는 장소에 갈 때는 유명한 건축물만 찾아다니기보다, 동네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걷다 보면 우연히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건물이나 골목, 카페 등이 있을 것입니다. 저학년 때는 비교적 작은 스케일의 건축물을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일상적인 공간을 유심히 관찰하는 경험이 설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이 건물 앞에서 멈추게 되었는지, 어떤 재료나 형태가 인상적이었는지, 사람들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를 짧게 기록해보면 좋습니다.

 

답사를 할 때는 단순히 예쁜 사진만 찍기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건물은 어디서부터 진입하게 되는지, 내부와 외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빛은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오래 머무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를 보더라도 이런 질문을 가지고 보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답사 후에는 사진 몇 장과 짧은 메모만 남겨도 충분합니다. “이 공간은 천장이 낮아지다가 갑자기 열려서 좋았다”, “사람들이 의도된 공간보다 계단 주변에 더 오래 머물렀다”처럼 사소한 기록도 좋습니다. 이런 기록들이 쌓이면 나중에 설계를 할 때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됩니다.

 

답사를 다녀올 때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하루에 너무 많은 곳을 가기보다 1~2곳을 천천히 보기

● 건물 전체 사진보다 입구, 계단, 창, 재료, 사람의 위치를 관찰하기

● 답사 후 좋았던 장면 3개와 아쉬웠던 점 1개를 기록하기

● 가능하다면 평면도나 단면도를 찾아보고 실제 경험과 비교해보기

 

2. 독서: 건축적 생각의 재료 모으기

방학에는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만 저학년 때부터 너무 어려운 건축 이론서를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건축을 조금 더 좋아하게 만들어주는 책, 공간을 다르게 보게 해주는 책, 건축가의 생각을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추천 도서

 

추천하고 싶은 책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건축의 기본 언어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처럼 설계 수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을 짧게 정리한 책은 가볍게 읽기 좋습니다. 두 번째는 공간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건축예찬』처럼 빛, 재료, 스케일, 비례, 소리 등 건축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다루는 책은 답사와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세 번째는 도시와 일상 공간을 다룬 책입니다. 건축은 건물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와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도시 산책이나 주거, 공공공간을 다룬 책들도 도움이 됩니다. 대표적으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건물 사이의 삶』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관심 있는 건축가의 인터뷰집이나 작품집을 하나씩 찾아보며, 본인에게 와닿는 개념과 문장을 모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책을 통해 넓어지는 건축적 시선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많이 읽는 것보다, 내 설계에 가져갈 수 있는 문장이나 생각을 남기는 것입니다. 인상 깊은 문장을 필사해도 좋고, 책을 읽다가 떠오른 공간 이미지를 간단히 스케치해도 좋습니다. 특히 저학년 때는 아직 자신만의 설계 언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책을 통해 여러 건축가와 도시를 간접적으로 만나보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3. 강의: 다음 학기를 위한 표현력 쌓기

방학 동안 강의를 듣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특히 저학년이라면 어려운 고급 툴이나 전문적인 이론 강의보다, 다음 학기 설계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을 익혀두는 것을 추천합니다. 학기 중에는 마감에 쫓기다 보니, 핀터레스트나 여러 레퍼런스에서 봤던 멋진 도면, 다이어그램, 콜라주 이미지를 따라 해보고 싶어도 충분히 시도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학은 그런 표현 방식을 천천히 연습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건축학과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AutoCAD, Rhino, SketchUp, Illustrator, Photoshop, InDesign 등 여러 툴을 다루게 되지만, 모든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다음 학기 설계에서 어떤 표현을 더 잘하고 싶은지 먼저 정하는 것입니다. 도면을 더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지, 모델링 속도를 높이고 싶은지, 다이어그램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고 싶은지, 패널 레이아웃을 더 보기 좋게 구성하고 싶은지에 따라 필요한 강의가 달라집니다.

 

디지털 툴로 확장되는 나만의 건축 표현

 

저학년에게 추천하는 강의 방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 AutoCAD: 선 정리, 레이어, 도면 출력 방식 익히기

● Rhino 또는 SketchUp: 간단한 매스와 공간 모델링 익히기

● Illustrator: 도면 선두께, 다이어그램, 패널 표현 익히기

● Photoshop: 이미지 보정, 콜라주, 렌더 후작업 익히기

● InDesign: 패널과 포트폴리오에서 이미지와 글을 배치하는 법 익히기

 

강의를 고를 때는 “이 강의를 들으면 내가 다음 학기 설계에서 어떤 표현을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도면 정리가 늘 어렵다면 AutoCAD와 Illustrator를, 모델링이 오래 걸린다면 Rhino나 SketchUp을, 발표 패널이 아쉽다면 Photoshop과 InDesign 강의를 먼저 들어보는 식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의를 듣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입니다. 방학 동안 작은 결과물을 하나 정해두면 강의가 실제 실력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작은 주택 하나를 모델링해보기”, “답사한 건물 하나를 다이어그램으로 정리해보기”, “지난 학기 패널 한 장을 다시 편집해보기”처럼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보는 것입니다. 저학년 방학의 툴 공부는 단순히 프로그램 기능을 많이 아는 것보다는 내가 생각한 공간을 더 잘 보여주고, 설계 의도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력을 쌓는 과정에 가깝다고 보면 좋습니다.

 

4. 기록: 나만의 건축 아카이브 만들기

답사, 독서, 강의를 각각 따로 끝내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저학년 때 만든 기록은 당장 완성도 높은 포트폴리오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나중에 자신이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지, 어떤 건축에 끌리는지 알 수 있는 작은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록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션(Notion), 블로그, 인스타그램 부계정, 아이패드 노트, 스케치북 등 어떤 방식이든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나만의 언어로 한 번 정리해보는 것입니다.

 

스케치와 사진으로 축적되는 나만의 건축 아카이브

 

예를 들어 답사를 다녀왔다면 사진 5장과 짧은 코멘트를 남길 수 있습니다. 책을 읽었다면 인상 깊은 문장과 그 문장에서 떠오른 공간 이미지를 적어볼 수 있습니다. 강의를 들었다면 따라 만든 결과물이나 새로 배운 기능을 정리해둘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만의 취향과 설계 방향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혼자 꾸준히 기록하는 것이 어렵다면, 기록용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블로그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올려보는 것도 좋습니다. 혹은 주변 동기들과 답사 기록이나 책에서 좋았던 문장을 공유해보는 방식도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OUTRO

방학을 잘 보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두 가지를 정해 꾸준히 해보는 것에 가깝습니다. 답사 한두 곳을 다녀와도 좋고,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도 좋고, 툴 강의 하나를 끝까지 따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나만의 언어로 조금씩 기록해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쌓인 작은 경험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아니더라도, 다음 학기 설계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눈과 생각의 재료가 되어줄 것입니다.